영국-사우디아라비아 태형제도 둘러싼 외교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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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사람의 죄를 매질로 다스려도 되는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 영국인이 무려 5백대의 태형 (笞刑) 을 선고받은 것을 계기로 태형제도를 둘러싼 동서양의 오랜 가치관 차이가 다시금 불거지고 있다.

영국과 사우디 두 나라는 외교분쟁에까지 휘말릴 조짐이다.

사우디 법원은 23일 영국 출신 간호사 데버러 패리 (38)에게 호주 출신 동료 간호사 이본 길포드 (55) 를 지난해 11월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하는 한편 또다른 영국인 간호사 루실 맥러클런 (31)에 대해선 살인공모 혐의로 징역 8년과 채찍질 5백대를 선고했다.

영국 정부가 발끈한 것은 주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아니라 종범에 대한 태형이었다.

사우디에서 사형은 피해자 가족이 동의할 경우 '디야' 라고 부르는 일종의 합의금만 내면 죽음을 면할 수 있고 형량도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미 주범 패리는 피해자 가족과 1백20만달러의 디야에 합의했다.

문제는 꼼짝없이 벌을 받게 된 공범 맥러클런이다.

길이 1m 이상의 대나무로 뒤쪽에서 달려나오면서 체중을 실어 사정없이 내리치는 태형은 한대만 맞아도 기절할 정도. 때문에 이 소식을 접한 영국 사람들은 여자의 몸으로 5백대를 맞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크다고 경악하고 있다.

여론이 들끓자 로빈 쿡 영국 외무장관은 "문명사회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반인륜적 판결" 이라고 말하고 실제 형이 집행될 경우 심각한 외교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사우디 정부는 딴 나라의 여론 때문에 고유한 종교.제도.관습을 바꿀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이다.

외국인이라고 예외를 인정할 경우 회교율법에 기초한 국가기강 자체가 흔들릴 것으로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아직 법으로 태형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15개국에 달한다.

미국은 주로 흑인노예와 군인들을 대상으로 시행해오던 태형을 지난 52년 공식 폐지한 바 있다.

런던 = 정우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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