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 필링]생계수단이냐 취미생활이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영화행사가 있던 어느날 에피소드 한토막. 스케줄이 밤 늦게 끝나는 바람에 나는 선배인 두명의 젊은 영화제작자의 차에 동승해 서울까지 함께 왔다.

밤길의 무료함을 이런 저런 이야기로 달래다가 나는 시침 뚝 떼고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 한국영화의 젊은 감독들 중에서 누구를 가장 기대할 만할까요?" 그러자 심야를 막 넘기는 차 안에는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사람은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운전을 하던 선배가 먼저 잡담을 늘어놓듯이 이름을 줄줄 나열했다.

사실 들으나마나한 이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 명단에 빠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막 웃었다.

그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런데 불현듯 뒤에 앉아 있던 다른 선배의 한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연이어 한마디 소리가 다가왔다.

"단 한명도 없지. 그게 사실이구. "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짐이라도 받듯이 반문했다.

"그래도 한명 정도만이라도 있다면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답변.

"그런 자식은 없어. "

어쩌면 이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영화평론가들에게는 자기가 지지하고 싶은 감독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자신의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제작자들이 서 있는 곳은 냉혹한 전쟁터다.

한편으로는 돈을 벌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명예를 지켜야 하는 전장 (戰場) .참으로 힘든 싸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동료 평론가들의 '전략적인' 글보다는 영화제작자들의 '생존경쟁' 에 관한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는 편이다.

나는 정말로 한국영화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주말영화평 또는 영화 별점란을 통해 영화평론가들은 한국영화에 무더기로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영화가 무언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닌지 의문을 갖는다. 혹시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회의가 쉴새없이 들이닥친다.

그런 상황에서 듣게 된 영화제작자 선배들의 단호한 이야기 - .나는 마치 총을 맞은 기분이었다.

"한국영화의 미래를 짊어진 젊은 영화감독들 그 누구에 대해서도 기대를 하지 않는다. "

그건 일종의 사망선고였다.

더 정확한 말로 그건 젊은 영화감독들 누구에게도 내 돈을 들여서 영화를 제작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의 매우 완곡한 표현이었다.

이건 그저 기분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영화담당 기자나 같잖은 평론가들이 늘어놓는 시시한 불평불만이 아니었다.

영화감독들에게 투자하여 돈을 버는 것이 생존수단인 영화제작자들의 입에서 나온 참으로 비장한 평결문이었다.

나는 차마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볼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 앞에 올 때까지 그저 침묵을 지켰다.

대신 많은 생각을 했다.

지난 2년간 데뷔한 수많은 신인감독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90년대 영화의 중심이 아시아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왜 한국영화는 뒷전을 맴돌고 있는 것일까?

그걸 그저 정책의 실패와 야비한 상업주의의 탓이라고만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도 한국영화는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이 신기한 현상에 대한 단순명쾌한 대답이 결국엔 두 제작자들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험한 표현으로, 마치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이…. "우리들은 생계수단이지만 너희들은 취미생활이잖아. 글쓰는 놈들, 영화를 만드는 놈들 (감독을 지칭함) , 그리고 주변에서 떠드는 놈들. 남이 망하는 걸 구경하자는 작자들. "

아. 이런!

정성일 <영화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