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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노회한 화가 ‘헛똑똑 기자’를 가지고 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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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나와 카민스키
다니엘 켈만 지음, 안성찬 옮김
들녘, 248쪽, 1만원

김수환 추기경 선종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방송과 신문은 그의 삶과 추억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추기경 위독설이 돌던 몇 년 전부터 미리 부음기사를 준비해둔 때문이다. 좋게 보자면 수의를 짓고 죽음을 차분히 준비하는 자세라 하겠지만, 삐딱하게 보자면 누군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못된 심보로 비칠 수도 있을 게다.

소설의 주인공 세바시티안 쵤너는 출세욕으로 활활 타오르는 30대 초반의 신문기자다. 그는 초야에 묻힌 천재 화가 카민스키의 전기를 써 대성공하리라는 욕망을 품는다. 화가를 인터뷰해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남은 과제는 딱 한 가지 뿐. 바로 그가 죽는 일이다. 그리고 책은, 반드시 죽은 직후에 출간되어야 한다. 죽어야 언론은 대서특필할 테고, 그림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테니까.

첫 만남. 카민스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생님의 그림은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라며 찬사를 늘어놓는 순간, 괴짜 노화가는 “그건 틀린 말이야”라 일축한다. 사실 카민스키가 명성을 얻은 건 ‘시력을 잃은 화가의 그림’이란 부제가 붙은 그림이 검은 안경 쓴 그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면서부터였다. 눈이 먼 게 아니었다.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린 작품을 설명하며 “한 마디로 나는 눈이 멀어가고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라 말했던 첫 인터뷰 기사 탓이었다. 예술계의 위선, 언론의 속성에 대한 풍자는 이렇게 소설 전반에 깔려 있다.


쵤너는 전기의 극적인 첫 장면을 위해 카민스키를 납치하다시피 해 그의 첫사랑을 찾아나서는 여행을 떠난다. 늙고 병든 화가를 제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은 오히려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났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경쾌한 문체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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