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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아름다운 선율에 감춰진 거장과 음반사의 뒷거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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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마티, 512쪽, 1만9000원

 카라얀과 안네 조피 무터가 ‘따뜻함’의 대명사로 남은 사진을 찍은 것은 1979년이었다. 16살이던 무터가 바이올린에서 막 턱을 떼고, 특유의 결이 고운 얼굴로 카라얀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말에 맞춰 지휘봉을 살짝 흔드는 듯한 카라얀은 무터에게 연주에 대한 조언을 던지는 중이다.

음반 애호가들에게 역사적인 장면이 된 이 사진 뒤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세 번째 부인을 맞은 카라얀은 자신의 소속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DG)이 전 부인에게 위자료를 대신 내주길 요구했다. 이 일로 둘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카라얀은 경쟁사인 EMI와도 ‘동거’를 시작했다. 이 거장의 뒤치다꺼리는 역시 간단치 않았다. EMI는 카라얀으로 인해 65만 파운드를 벌어들였지만 100만 파운드의 간접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카라얀은 이 같은 적자 속에서도 오페라 ‘토스카’를 녹음하고 싶어했다. 잘 팔릴 리 없어 보이는 앨범이었다. 휘청거리는 회사를 대신해 난색을 표하는 홍보 담당자에게 카라얀이 입을 떼었다. “그 작업을 어떻게든 해야 할 거야. 무터와 비발디의 ‘사계’를 하면 어떨까?” 대중적인 레퍼토리와 막 떠오르는 신예, 그리고 자신의 노련함이 만나 밀리언 셀러를 만들어낼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는 ‘토스카’를 녹음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뒤 숨어있는 일화를 낱낱이 밝혔다. ‘나치의 때가 묻은 음반사’와 ‘알코올 중독에 찌든 프로듀서들’ ‘전 세계에서 90장밖에 팔리지 않은 앨범’ ‘술집에 앉아 카드놀이 하듯 연주자를 거래하는 음반사 사장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이를 위해 음반사의 전·현직 관계자와 연주자들을 인터뷰한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장막 안에서 추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사이에 클래식 음반 시장은 서서히 몰락했다. 음반사의 물량 경쟁과 획일화, 재구매를 차단한 CD의 반영구성 등도 종말을 당겼다. 모든 독설이 그렇듯, 저자의 불편하고 거친 문장은 많은 적을 낳았다. 음반사 낙소스는 소송을 제기했고, 책은 2007년 나온 지 6개월 만에 판매금지되기도 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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