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같은 환쟁이는 되기 싫다던 소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3호 13면

박수근(1914~65)의 그림 ‘빨래터’.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되는 ‘신화’를 만들자마자 위작 논란이라는 긴 그림자를 드리웠던 작품이다. 중견 소설가 이경자(61)씨의 동명 소설 『빨래터』는 이 위작 논란에서 출발한다. 박수근의 장남 성남이 위작 논란을 기사화하려는 기자의 전화를 받는 첫 장면이 그렇다. 그림의 원소장가인 존 릭스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그의 눈앞에는 아버지와의 옛일들이 필름처럼 펼쳐진다.

소설『빨래터』, 이경자 지음, 문이당, 252쪽, 1만원

다섯 살, 그림의 모델 노릇을 하느라 화장실도 못 가고 옴짝달싹 못하던 성남은 아버지가 무섭고 미웠다. 사춘기로 들어서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더 커져만 간다. 앞집에서 쌀을 꾸고, 옆집에서 그 두 배만큼 꾸어 와 빌린 쌀을 갚아야 하는 빈궁이 아이의 마음을 내리눌렀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돈 되지 않는 그림만 그리는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는 일이었다. 아들은 아버지 같은 ‘환쟁이’만은 되지 않겠노라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들을 달랜다.

“부자라고 행복한 건 아니야. 가난해도 서로 믿고 위해 주면서 사는 게 행복한 거란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너희를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아버지의 맘이 어떨까, 상상해 봐라. (…)돈이 없어 동화책을 못 사주시니까 손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주시지 않았니?”

소박하고 가난한 이들을 그린 그림에서 드러나듯 박수근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예술가였다. 박수근이 어렸을 적 “사람을 사귈 때 틈 없는 사람보다 틈 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서일까. 그는 과일 하나를 사더라도 가진 돈을 셋으로 나눠 나란히 앉은 세 명의 행상에게 골고루 나누어 쓰는 마음 씀씀이를 가졌다. 그런 아버지를 부정하며 자라나던 성남은 결국 화가가 된다. 그러나 너무나도 큰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받은 2세의 고통에 위작 논란까지, 그의 성장통은 예순을 넘긴 나이까지 끝나지 않는다.

부자 화가의 생이 교차되며 펼쳐지는 이 소설은 박수근의 전기이자, 소년 박성남의 성장기다. ‘할아버지와 손자’ ‘빨래터’ ‘세 여인’ 등 박수근의 대표작들이 태어나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 그림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빨래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어떤 판단도 내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 소박한 삶에서 얻는 행복, 진정한 사랑의 의미 등 45억원이란 수치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가치들을 되살려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