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북한 특권층의 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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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장승길 이집트주재 북한대사및 장승호 프랑스주재 북한총대표부 참사관 일가의 미국 망명은 북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 (黃長燁) 의 망명으로부터 6개월만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북한 통치계층의 동요가 확산되고 있음을 뜻한다.

북한에서 외교관은, 더구나 대사는, 더더구나 중동과 아프리카에 대한 북한외교의 야전사령관격인 이집트대사는 특권계층에 속하는데 형제외교관 일가가 탈북을 결행했다는 것은 북한 통치체제의 한 모서리가 무너지는 징후에 틀림없다.

특히 장대사부부의 망명은 황장엽 망명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김정일 (金正日)에게 준다고 하겠다.

70대인 황장엽의 경우는 '김정일 사람' 이라기 보다는 '김일성 (金日成) 사람' 으로 김정일정권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50대의 김정일과 불편한 관계에 빠졌던 것이나, 40대의 장대사부부는 글자 그대로 '김정일 사람' 이다.

우선 장대사의 부인 최해옥은 북한이 자랑하는 '혁명 4대 가극' 가운데 하나인 '꽃파는 처녀' 의 여주인공으로 김정일 스스로에 의해 뽑혔다.

'꽃파는 처녀 꽃분이의 망명' 은 북한 주민들에게 '주체사상의 망명' 만큼 큰 충격을 줄 것이다.

장대사의 경우 본인의 능력이 인정되기도 했겠지만 부인 덕을 많이 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떻든 그 역시 김정일의 개인적 배려 없이는 결코 외교부 부부장과 이집트대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키아벨리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는 '군주론' 에서 "군주여, 당신이 어떤 부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그가 당신에게 충성으로 보답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결코 충성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김정일로서는 마치 카이사르가 자신을 암살하고자 칼을 빼든 무리 가운데 브루투스를 발견하곤 "브루투스, 너마저도" 라고 외쳤듯, "최해옥.장승길, 너희들마저도" 라고 소리질렀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의 망명을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장대사의 경우 차남의 96년 서방망명에 따른 개인적 고뇌, 그리고 북한의 중동지역 미사일판매 총책 (總責) 임에 착안한 미정보기관의 접근 등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장래에 대한 의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북한의 오랜 맹방인 소련이나 중국마저 한국과 수교하던 때도 한국과의 수교에 응하지 않았던 사회주의 국가 이집트가 마침내 한국과 수교한 현실에서 한국과 국제정치 전반을 새롭게 인식한 반면, 김일성이 죽은 뒤 식량위기 등으로 비틀거리는 김정일 정권에서 '북한붕괴' 의 개연성을 읽었을 것이다.

게다가 봉급도 제때 지급하지 못하며 현지에서 밀수라도 해서 공관을 유지하라는 본국의 지시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크레인 브린튼은 '혁명의 해부' 에서 정부가 봉급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의 재정파탄에 빠지면 공무원들의 사기가 빠르게 떨어지고 '체제로부터의 이반 (離反)' 을 고려하게 되며 이것이 세계사의 유명한 혁명들의 전야 (前夜)에 나타난 공통된 현상이었다고 지적한바 있다.

프랑스의 형과 이집트의 동생이 손발을 맞췄다는 사실 역시 주목된다.

이는 '철통같은 감시체제' 로 흔히 인식되는 북한의 전체주의적 독재체제가 김일성이 죽은 뒤 빠르게 이완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황장엽 망명에 이은 장승길 일가의 망명이 김정일정권의 붕괴, 더 나아가 북한이라는 국가의 붕괴를 알리는 '오동잎의 떨어짐' 인가의 물음은 보다 더 신중히 검토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김정일정권이 '붕괴' 는 아닐지라도 '쇠퇴' 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로선 한편으로 우리 내부를 올바르게 손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북한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긴 안목에서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사건이 북.미관계의 진전에 영향을 주지 않게끔 신경쓰는 미국의 입장도 고려해, 장씨 일가의 한국행 같은 작은 문제에 대해선 서두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김학준 [인천대총장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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