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고른 딱 한장의 음반 ③ 문계씨의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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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씨의 방은 음반투성이다. 책장 속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중 삼중으로 음반이 쌓여 있다. 그래도 문씨는 듣고 싶은 음반을 정확하게 찾아내 매일 대여섯 시간씩 음악 속에서 산다. 그가 든 LP는 첼리스트 샤프란의 데뷔 앨범(RCA). [김경빈 기자]

 ‘문우 음악재단’을 운영하는 문계(68)씨는 몸가짐이 꼿꼿하다. 작고 가벼운 몸집에서 단정한 힘이 느껴진다. “평생 한번도 몸무게 40㎏을 넘어본 적이 없어요.” 그는 “아무래도 음반 때문인 것 같다”고 한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오늘은 어떤 음반을 들을까, 아직 못 찾은 음악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이 시작되죠. 듣고 싶은 음반을 못 구하면 잠도 안 와요.”

 문씨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은 4만8000여 장이다. 40년 넘게 모았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교향곡 음반을 모은 책장이 서 있다. 다른 쪽 벽을 타고 실내악·독주곡·성악곡 음반이 흘러간다. 현관 바로 옆의 방 하나는 문만 빼고 모든 벽이 음반일 정도. 15~21세기 음악 작품이 고루 갖춰져 있다.

아파트 하나에 쌓고도 넘쳐 단독 주택을 따로 구했다. “주택에는 오페라 관련 음반과 DVD만 모아 놨죠.” 방송국의 라디오 PD들은 절판돼 구할 수 없는 음반을 찾기 위해 문씨를 찾는다. 연주자들도 공연을 앞두고 CD를 빌리려 집에 들를 정도다.

그런데도 정작 그는 “모자라다”고 한다. “전 세계를 생각해 보세요. 아직도 제 손에 들어오지 않은 음반이 너무 많아요.” 그는 지난달에 프랑스 지휘자 프랭크 포셀의 음반을 찾아냈다. 인터넷 중고 시장을 뒤져 얼굴 모르는 벨기에 사람에게 산 앨범 ‘투 뷰티풀 투 라스트’는 그가 25년 전부터 찾던 것이었다.

◆걸어서 사다=시작은 소박했다. “첫 음반은 두 다리로 산 거나 다름 없어요.” 고등학생이던 그는 버스 세 번 탈 돈과 음반을 맞바꿨다. “한 장에 100원 하던 LP를 사려고 서울 돈암동에서 옛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까지 걸어 다니며 돈을 모았어요. 그마저 너무 비싸서 깎고, 외상으로 하고 그랬죠.” 그렇게 산 음반은 클라라 하스킬(1895~1960)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특유의 감수성으로 주목받았지만 신경마비·뇌종양 등 평생 병마와 싸웠던 피아니스트의 녹음이다. 짧고 위험한 예술가의 인생에 문씨는 넋을 놓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대 순서로 음반을 모았어요.” 종교 음악에서 시작해 차곡차곡 음악사를 훑어나갔다.

“고등학생 때 이미 100여 장의 음반이 있었는데 보수적이던 아버지에게 혼날까봐 친구 집에 맡겨놓고 들었죠.” 5남 4녀 중 여섯째였던 그는 오빠 셋과 언니 둘이 늘 듣던 클래식 음악에 “젖어 지냈다”는 표현을 쓴다.

◆나이를 잊다=음반은 문씨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통로다. 그는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앨범을 공수하기 위해 주변의 젊은 음악 매니어들과 머리를 맞댄다. 70년대에 7년 동안 여수MBC에서 라디오 PD로 일했던 경력도 그의 음악감상 폭을 넓혔다. 젊고 의욕적인 연주자들에게 옛 LP의 음악을 CD로 구워주는 일도 잦다. LP의 표지 사진을 40% 축소 복사하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턴테이블의 바늘을 들었다 놨다 하며 깔끔한 CD를 만들어 낸다.

22년 전 아예 음악재단을 설립한 것도 연주자들을 적극 후원하기 위해서다. 그는 매년 몇 명의 연주자를 선정해 여러 각도에서 지원하고 있다. 음반과 음악이 바꿔놓은 삶이다. “공식 직함은 이사장이죠. 아휴, 그래도 그냥 ‘음반 창고지기’로 불러주세요. ‘CD 굽는 할머니’도 좋겠네. 매일 나이를 잊고 음악을 찾아 헤매는….” ‘창고지기 할머니’의 꿈은 “오래 살고 돈 많이 모아 음반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다.

김호정 기자 , 사진=김경빈 기자

■ 문계씨가 말하는 이 음반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다닐 샤프란(첼로)
아울로스 뮤직

 1996년, 쉰다섯이던 나는 한 연주자 앞에 서 있었다. 종이와 펜을 들고 사인받을 준비 중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나보다 스무살 많은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이었다. 처음 내한한 샤프란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했다. 따뜻하고 유연하며 아름다운 품격이 있는, 독특한 첼로의 음색. 옛 소련에서 망명하지 않고 첼로를 붙들고 살았던 인물의 목소리인 듯했다. 이 독주회 이후 그의 음반을 찾아 헤맸다. 결국 음반사 RCA에서 59년 녹음한 데뷔 LP를 찾았다. 독주회 이듬해 샤프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고, 이 LP는 4만 장 넘는 내 음반 중 가장 빛나는 한 장이 됐다. 하지만 이 LP는 CD로 나오지 않았다. 아울로스 뮤직에서 CD로 나온 샤프란의 슈베르트 연주를 추천하고 싶다.

■‘음반 고수’ 따라잡기 이렇게

- 옛 연주자들의 음반에 주목하라. 기량·음질이 아닌 ‘정신’이 빛난다.

- 음반 매장은 ‘현장’이다. 오래된 음반 가게에 가서 천천히 훑어라.

- 상상하는 힘이 필요하다. ‘이 음악을 카라얀이 지휘하면 어떨까’ 같은 상상에서 음악의 즐거움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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