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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 연인이 되고, 시인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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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시인·소설가 29명이 춘천에 얽힌 추억을 풀어낸 산문집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을 펴냈다. 산문집을 기획한 시인 한명희씨는 “『춘천…』은 문학작품이자 회고담이며 여행안내서”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필자로 참여한 유안진·오정희·이승훈·한명희·박남철·박찬일·이문재씨. [강정현 기자]

 
기쁠 일보다 서러울 일이 많던 지리멸렬한 청춘들에게 물과 안개의 도시 춘천은 해방구였다. 눈보라처럼 꽃잎이 날리는 경춘선 열차를 타는 일은 학교나 일상의 구속, 성가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잠시나마 멀어짐을 의미했다. 막국수·닭갈비 같은 색다른 먹거리가 입을 즐겁게 하던 곳, 미군부대 캠프 페이지와 양공주를 목격할 수 있던 곳. 그곳에 다녀오면 서먹서먹하던 남녀는 종종 연인이 되곤 했다.

춘천과 인연 있는 시인·소설가에게 삶과 문학의 배경으로서 춘천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춘천에서 태어났거나 이런저런 인연으로 춘천을 경험한 문인들이 기억 속의 춘천, 춘천이 문학에 미친 영향 등을 털어놓은 산문집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문학동네·사진)이 출간됐다. 이승훈·전상국·한수산·최수철·박상우·이순원·김도연씨 등 춘천에서 태어났거나 학창 시절을 춘천에서 보낸 문인들, 오세영·최동호·유안진·오정희·이문재씨 등 춘천을 잠시 ‘스쳐 간’ 문인 등 시인·소설가 29명이 글을 보탰다.

춘천 경험의 폭과 깊이가 다른 만큼이나 문인들의 글 색깔은 제각각이다. 소설가 오정희씨는 ‘봄내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소곳한 것과는 거리가 멀던 여자 친구가 춘천을 다녀 온 후 물속에 풍덩 빠졌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눈빛과 목소리가 촉촉해졌더라”고 회고했다. 연애 감정 없던 동아리 남자 친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오씨는 결혼과 함께 남편의 고향 춘천에 자리잡으며 “낯선 곳에서의 자발적 유폐와 고독에의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춘천은 여지 없이 내면으로 밀려들었다. 오씨는 그 결과 “‘파로호’ ‘꿈꾸는 새’ 등 여러 편의 작품을 춘천 경험을 통해 얻었다”고 밝혔다. 출간을 기념해 24일 상경한 오씨는 “30년 넘게 살았어도 춘천에서는 창작에 필요한 세상으로부터의 거리감, 낯설음이 유지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인 이승훈씨는 “고향 춘천은 가을 산길의 들국화처럼 자그만하고 애잔한 곳”이라며 “하지만 직접 가보면 상당히 화려한 곳이어서 촌스러운 아름다움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이씨는 정작 산문 ‘내 고향 춘천’에서는 대인기피증, 이상한 상실감과 슬픔 등으로 얼룩진 행복하지 못했던 춘천 시절을 추억한다. 어린시절의 전쟁 체험, 불우했던 가정 환경 탓이다.

젊은 소설가 박형서씨는 체로키 인디언인 제이크와의 교유를 떠올리며 “특정 지역의 아름다움은 풍광보다 그 풍광을 배경처럼 거느린 추억으로 인해 뇌리에 각인된다”고 썼다. 결국 사람이 결부되야 한다는 것이다. 경북 안동 출신인 시인 유안진씨는 “봄내, 봄의 개울을 뜻하는 춘천(春川)은 이름 자체로 시를 쓰게 만든다”고 말했다.

산문집은 춘천시가 문인들로 하여금 알려지지 않은 춘천 이야기를 발굴해 쓰도록 의뢰해 만들어졌다. 제작 과정에서 문인들의 춘천 이야기를 쓰자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어 이번 산문집이 나오게 됐다.

신준봉 기자 ,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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