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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30년 전 일기장 속 ‘여고생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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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란제리 소녀시대
김용희 지음, 생각의 나무
320쪽, 1만1000원

 

소녀에 대한 환상을 확 깨는 ‘독한’ 소설이다. 때는 바야흐로 체력장에서 수류탄으로 멀리던지기를 측정하던 1979년.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여고생들의 감청색 교복 위에 허연 비듬이 싸락눈처럼 수북이 쌓이던 시절. 여고 교실은 땀 냄새, 발 냄새, 미리 까먹은 도시락 냄새에 생리혈 냄새로 뒤범벅이었다. 소설은 볼펜 돌리기 달인이었던 대구 정화여고 2학년 이정희의 시선으로 한 시대를 그려낸다. 처녀막이 다칠까 봐 자전거도 못 타게 했던 엄마, 시도 때도 없이 매타작을 해대던 선생님들, 급우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던 규율부 간부가 있었다. 가슴을 졸라매는 브래지어에다 자칫하면 얼룩을 남기고 마는 생리혈도 소녀를 괴롭혔다. ‘강간’이란 위험 앞에 무방비로 놓여 있다는 막연한 공포까지….

교련복을 입고 삼각건과 붕대감기 훈련을 하던 군사독재 치하에 소녀 정희를 둘러싼 건 일상적인 폭력과 억압이었다. 그래도 끊임없이 해방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청춘의 본능. 남진·혜은이를 좋아하던 소녀는 ‘선데이 서울’을 몰래 챙겨 읽고 빵집에서 남학생들과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미팅”을 한다. 서울서 전학 온 문학소녀 혜주를 친구로 사귄 뒤 “시집을 들고 고뇌에 잠긴 듯 이야기하는 남학생과 여학생. 공부(문학)야말로 연애를 위한 가장 훌륭한 매개물이자 장식물”이란 통찰도 얻는다.

우울한 시대에 발랄하게 살아가는 명랑 소녀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문학평론가인 지은이의 첫 소설인 이 작품은 30년 전 일기장을 펼쳐보는 듯 생생하다. 10대인 딸의 눈높이에 맞춰 썼다는 작가의 변을 감안하면, 데뷔작은 성공적이다. 정제되지 않은 문장이 간혹 걸리는 점은 아쉽다. 추억을 되새기고픈 40대, 엄마의 옛 일기장을 훔쳐보고픈 10대에게 권한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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