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과수원도 국수틀로 뽑았지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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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명물인 방앗간국수의 맥을 잇고 있는 김영선·성칠·성산씨(왼쪽부터). 가업을 물려받아 수제 국수를 만드는 3남매다. [예산=조용철 기자]

충남 예산읍장. 시장 안쪽에 국수 면발을 치렁치렁 늘어놓고 말리는 국수가게가 줄지어 있다. 전국 유일의 수제 국수 거리다. 예산읍에만 가내 수공업 국수공장은 예닐곱 군데나 된다. 흥미로운 건 예산 국수공장은 모두 뿌리가 하나란 점이다. 1965년 김영선(70)·성산(60)·성칠(58) 씨 3남매가 시작한 ‘쌍송국수’다.

“6·25전쟁이 나기 전부터 국수를 했어. 그때는 방앗간에서 이것저것 다 했잖어. 밀가루 빻은 김에 국수도 눌러줬지. 어머니 고향이 평양이라 평양집이라고 했는디, 그때도 평양집이라면 국수로 알아줬어.” 어머니로부터 가장 먼저 기술을 배운 영선 씨의 말이다. 그는 힘이 달려 4년 전에 국수 뽑는 일을 접었다.

“전쟁 막 끝나자마자 아버지가 국수 기계를 새로 들여놓고, 이 집을 지었다고 허대유. 그때만 해도 예산에 2층 집이 딱 두 곳 있었다고 허든디, 국수 면발을 널려고 일부러 2층 집을 지은 거쥬.”

방앗간 국수를 이어받아 현재 쌍송국수를 운영 중인 큰아들 성산 씨가 195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흙벽 집의 내력을 들려줬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국수를 배웠시유. 동생은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시작허고. 딱히 배운 것도 없지유, 어머니 아버지 하던 대로 따라만 했으니께.”

65년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누우면서 방앗간 국수는 딸 부부에게 넘어갔다. “누님이 당시 직공이던 매형과 눈이 맞아 살림을 내면서, 한마디로 머슴이 주인 된 거쥬.” 성산씨의 너스레다. 막내 성칠씨는 그 집에서 일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월급 3만원 받고 매형 국수가게에 취직했어유. 그때 월급쟁이가 한 달에 2만원 받던 시절이니께 국수가게가 먹고 살만 했쥬.”

국수공장은 60~70년대가 호시절이었다. 마땅히 먹을 게 없던 시절, 국수는 주식이자 간식이었다. “인천에 가서 밀가루를 한 트럭씩 떼오고 그랬어. 예산역 앞에 풀어놓으면 우마차로 네댓 번은 실어날러야 했지. 그땐 볼만한 구경거리였어. 국수 뽑아 집도 사고, 식당 자리도 사고, 과수원도 사고….”

72년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뜬 뒤에도 영선 씨는 혼자 서울까지 올라가 국수기계를 맞추고 밀가루를 주문하러 인천에 다녔다. 성산씨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도, 외환위기 여파로 성칠 씨가 고생했을 때도 큰누나는 국수를 뽑아 두 동생을 도왔다. 힘들 때마다 버틸 수 있었던 건 수작업 전통을 지켰기 때문이다. 성칠 씨는 “잘 팔린다고 해서 방앗간 부수고 공장을 세웠다면 예산국수 명맥은 이미 끊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10년쯤 전 성칠 씨는 ‘버들방앗간’이란 국수가게를 차려 분가했다.

형제의 국수가게는 아버지 때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름한 방앗간에 단출하게 놓인 반죽 기계와 국수틀이 보였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손으로 돌리는 롤러 반죽기와 면을 뽑는 틀이 이제는 전기모터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 정도다. 면을 햇볕에 말리고 손으로 뚝뚝 끊는 방식은 아버지 세대의 것 그대로다.

“반죽은 별 것 없슈. 20㎏ 밀가루 한 포대에 소금물 네 바가지 반. 습한 날은 소금을 더하고, 건조한 날은 좀 덜 허고, 그것뿐이쥬.”

성산씨가 앵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반죽 기계에 밀가루를 부으면서 40년간 익힌 숙달된 기술을 선보인다. 반죽 기계 밑구멍으로 나오는 넓죽한 밀가루 반죽을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플라스틱 봉에 둘둘 만다. 이 과정을 서너 번 반복하면 적당한 두께로 눌려진 반죽이 완성된다. 국수틀에 들어간 반죽은 가는 면으로 나오는데, 이때 시누대로 면발의 허리를 걷어올리듯이 받쳐 공중에 매달아 둔다. 너울 치듯이 공중에 널린 국수 가락을 탁탁 쳐 자르면, 2자 길이로 머리를 늘어뜨린 국수 면발이 완성된다. 이 상태로 햇볕에 말린다. 3남매가 한결같이 말하는 맛있는 국수 만들기 비법이 바로 이 말리는 공정이다.

“면을 뽑자마자 햇볕에 말리는데, 면이 늘어지지 않게 또 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말려야지. 그리고 응달에 좀 재 놨다가 다음날 아침에 다시 밖에다 말려야 해. 원래 국수는 끊는 물에 팔팔 끊여 먹잖여. 그러니까 국수가 속까지 제대로 말라야, 먹을 때 부들부들하면서도 끈기가 있어.” 누님의 노하우에 성산 씨도 “계절·습도·바람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진다”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말린 국수를 손으로 뚝뚝 끊어 갱지에 말아 포장을 한다. 손으로 쓱쓱 만져 촉진도 겸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형제의 손바닥은 늘 굳은살이 배겨 있다. 3남매의 국수 역사는 3대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성산 씨 큰아들이 아직은 가업을 이을 마음이 없단다. 예나 지금이나 가내 수공업을 못 벗어나서다.

“하루에 20㎏ 짜리 밀가루 10포대 작업하는디, 한 포대에서 국수가 12다발 나와유. 12개들이 한 포대에 3만5000원에서 4만5000원에 받으니께, 밀가루 값 지하고 나믄 한 포대에 만원 남으려나. 그래도 아들이 계속하믄 좋것는디….”

그래도 보람은 있다. 뽑아 놓기만 하면 남기지 않고 죄다 팔려서다. 전국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주문을 한다. 30년 넘은 단골도 여럿이다. 손으로 뽑는 국수여서다.

예산=김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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