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북한, 정전체제 인정 속셈 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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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를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북한의 외교적 장기 (長技)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지난 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을 준수할 준비가 돼있다고 밝힘으로써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하고 나선 것이다.

95년4월 이래 정전협정체제를 부인하고 무력화하려는 북한의 시도에 맞서온 남한이나 미국측이 듣기에 따라서는 귀가 번쩍 뜨일 소리다.

5일 중앙통신을 통해 발표된 북한 외교부 대변인의 "현재의 정전위원회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적인 체제가 만들어질 때까지 당연히 정전협정이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는 성명은 한반도정세와 관련해 북한만 빼놓고 여러나라가 입을 모은듯이 주장해온 내용이다.

정전협정의 사멸을 주장해온 북한이 돌연 정전협정의 유효설을 주장하고 나선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우선 4자회담 예비회담 개최를 몇시간 앞둔 시점에서 성명이 발표됐다는 데서 북한이 4자회담을 통해 실리와 명분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북한편을 들어줄 것으로 보이는 중국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정전협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 외에 더욱 중요한 점은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위한 방편이라는 점이다.

평화협정이 가능하려면 논리적으로 정전체제라는 전제가 성립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북한이 명분을 살림으로써 국제적인 식량지원에 기대를 걸겠다는 의도다.

외교부의 성명이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등을 촉구한 동남아국가연합 (ASEAN) 의 한반도에 관한 성명을 계기로 삼고 있는데서 그러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북한이 어떠한 의도를 가졌든 국제적인 신용을 얻으려면 외교부대변인 성명의 진의를 증명해야 한다.

그 유일한 방법은 물론 북한이 무력화를 시도해 온 정전협정을 원상회복시키는 일이다.

군사정전위원회를 비롯,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기능을 복구하는 등 협정에 규정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4자회담을 깨지지 않게 하는 과도기적 체제라는데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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