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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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필이면 이때, 우리 사회가 그분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은 가셨다. 애도에 앞서 감히 원망부터 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은, 김 추기경이 우리 사회에 남긴 족적이 너무나도 넓고 깊기 때문이다. 누가 있어 앞으로 그분을 대신할 것인가.

추기경은 지난해 말 병상에서 마지막 노래로 ‘순교자 찬가’를 불렀다. 우리가 보기에는 추기경 자신이 대한민국 사회의 순교자였다. 그는 1970·80년대에 독재정권에 맞서 일관되게 저항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서 명동성당을 민주화의 보루로 내주었다. 유신 치하에서는 “진리는 감추어지고 정의는 너무 무력한 세상”이라고 개탄했고, 5공 독재를 향해 “부정과 불의는 영속하지 못한다”고 일갈했다. 수감 중인 부천서 성폭행사건 피해자 권인숙씨에게 손수 만든 카드를 보내 위로했고, 억울하게 처형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을 위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시라”며 눈물로 기도했다.

추기경은 천주교 신부이면서도 종교와 사상을 초월한 나라 전체의 어른이었다. 상식과 균형감각이 몸에 밴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사회가 한쪽으로 너무 기운다고 느낄 때는 따끔한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정권 때는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친북 쪽으로 가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쓴소리를 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인권 탄압도 매섭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북한 청소년에게 과학책 보내기 운동을 펼친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된 대한민국이 너무나 큰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추기경은 생전에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된 사회를 통합하고 실업자를 위해 일자리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지난해 촛불시위 때는 “웃으면서 대화해야 문제가 풀린다”고 소통과 화합을 권유했다. 우리 사회가 진작에 귀담아듣고 실천했어야 할 메시지였다. 김 추기경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 빈자리가 아무리 허전하더라도 고인의 뜻만큼은 온전히 이어받아야 한다. 큰 어른의 선종(善終)은 남은 이들의 반성과 실천의 출발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