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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박정희시대]제1부.북한의 박정희 연구(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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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정희 (朴正熙) 는 누구인가.

1961년 5월16일 새벽 서울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서 던진 의문이다.

쿠데타 세력은 좌우 어느쪽인가, 친미 (親美) 적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쿠데타군의 지휘자 박정희의 좌익경력 때문이었다.

서울과 워싱턴은 물론 도쿄 (東京) 의 정가 (政街) 까지도 긴장했다.

쿠데타군은 공약에서 반공 (反共) 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한국군 일부 장성과 주한 (駐韓) 미군은 쿠데타의 성격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더구나 16일 오후7시 "한국장교 스스로 일으킨 의거에 대해 왜 미군이 간섭하는가" 라는 평양방송 보도는 박정희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평양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 무렵 평양은 한국 정세에 고무돼 있었다.

5.16 1년전인 60년 6월13일 김일성 (金日成.북한수상) 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평양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에게 '남조선혁명' 에 대해 희망적인 견해를 피력했었다.

본사 (本社)가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단독 입수한 푸자노프 대사의 '비망록' (6월13일자)에 기록돼 있는 金의 발언내용. "남조선에는 노동당 지하당원이 1천~2천명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대남 (對南) 노선은 새로운 진보정당과 단체들의 창설을 고무하는 것이다.

현재 그런 당으로는 한국사회당과 사회대중당등이 있다.

우리는 이 당들의 지도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조선 정부의 일부 주요 지위에는 우리 사람들이 박혀 있다.

" 김일성의 이런 견해는 소련에 대한 허장성세 (虛張聲勢)가 섞인 다소 과장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학생들의 급진적 통일운동등 61년의 한국정세는 金의 견해를 받쳐주는 일면이 있다.

그 무렵 평양은 남쪽 진보세력의 통일논의를 지원하는 평화공세를 더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서울의 쿠데타는 그들의 평화공세를 일거에 차단한 사태였다.

그런데 평양당국은 朴의 경력에 주목했고 급기야 무역성차관을 지낸 황태성 (黃泰成) 을 밀파 (密派) , 朴의 의중을 타진하고 평화통일을 논의하려 했다.

이것은 북한이 朴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음을 말해준다.

朴이 권력의 자리에 다가서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인가.

그의 생애중 어떤 대목들이 북한의 환상을 불러온 것인가.

도대체 박정희는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좌익경력을 포함한 그의 과거로 다가가기 전에 먼저 5.16인식에 대한 평양의 혼란상을 살펴볼 만하다.

5.16 소식에 평양도 발칵 뒤집혔다.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날 김일성은 함흥지역에 현지지도를 나가 있다가 뒤늦게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金은 즉시 대남 공작총본부인 3호청사의 정보망을 총 동원해 쿠데타의 진상과 사태추이를 알아보고, 정치위원회를 긴급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오후4시쯤 金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노동당 중앙당사에서는 긴급 정치위원회가 열렸다.

3호청사 문화부장 김중린 (金仲麟.현 노동당 근로단체담당비서) 이 "박정희소장과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의 소장장교들이 움직였다는 정보가 있다" 며 사태발생에 대한 윤곽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는 질문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김일성은 즉시 그동안 3호청사에 수집돼 있는 朴의 신상자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날의 증언. 朴 관련정보 모두 수집 "金의 지시로 朴을 포함해 쿠데타 주요간부 8명에 대한 신상자료가 회의에 제출됐어요. 당시 한국군 장성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개개인에 대한 세세한 신상자료가 마련돼 있었어요. 박정희 자료는 주로 경북출신의 남로당원, 한국군 장교였다가 월북한 사람들이 쓴 것이었지요. 그중 70%정도가 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 당시 3호청사의 간부로 있으면서 회의자료를 준비했던 전 북한고위관리 (차관급)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의 증언이다.

그러나 박정희 자료는 과거경력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정작 필요한 최신 자료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4.19이후 북한은 대대적인 평화통일 공세에 주력하느라 한국군의 동향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金은 빠른 시일안에 정책토론회를 열어 4.19후 정세와 쿠데타 발발의 배경을 총괄.정리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5월20일과 21일 양일간 노동당 본청사 회의실에서 정책토론회가 벌어졌다.

이 정책토론회에는 책임지도원급 이상 3호청사 사람과 당 국제부.내각 외무성의 중요간부, 주요 연구소의 책임연구원등 3백50여명이 참가했다.

이 토론회에 참석했던 황일호씨의 증언. "토론과정에서 군사쿠데타가 미국의 조종에 따른 것이냐, 아니면 민족지향적인 청년장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냐를 놓고 상당히 옥신각신했어요.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됐다고 결론이 났지만 주체세력의 면면을 볼 때 진상을 보다 신중히 조사해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많았어요. 그래서 朴과 김종필 (金鍾泌) 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어요. " 3호청사는 즉각 박정희.김종필.유원식 (柳原植) 등 '혁명주체' 세력의 핵심들에 대한 성향조사에 착수했다.

대남연락부는 5월26일 평양여관 특호실에 朴을 어려서부터 지켜봤던 황태성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 49년 대대장으로 있다가 월북한 강태무 (姜泰武) 등 14명을 소환했다.

이들은 주량.버릇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변인물.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항을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모인 보고서와 토론자료를 쌓아보니 1에 달했다.

북한의 박정희연구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朴이 해방 직후 박헌영 (朴憲永) 이 이끈 남로당 (南勞黨)에 관계했고, 그의 친형인 박상희 (朴相熙) 역시 '대구 10월폭동' 에 참여했다가 희생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 제출된 보고서들은 대부분 朴을 민족성향이 강한 인물로 평가했다.

'민족성향 강한 인물' 평가 북한 수뇌부는 박정희.김종필등의 인물파악 과정에서 "뭔가 대화가 될 수 있다" 는 희망적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물론 반론도 없지 않았다.

전 북한 최고검찰소 검사였던 김중종 (金中鍾.71.서울거주) 씨의 증언. "북한은 쿠데타 주도세력 내부에 좌익경력을 가진 인물이 많다는 점에 고무됐어요. 그러나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혁신계인사등이 대거 체포되자 노동당 내부에서도 과거경력만 가지고 朴을 호의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회의론이 제기됐어요. " 그러나 황태성.강태무등이 계속 협상론을 제기하고 어윤갑 부장을 비롯해 대남연락부의 간부들도 이에 동조했다.

북한은 61년7월 중순 정치위원회를 다시 열고 "朴이 반공을 표방하고 있고 혁신계를 탄압하고 있지만 우리와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도 있다.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대표를 파견키로 하자" 는 결론을 내렸다.

朴에 대해 가장 우호적으로 평가했던 黃이 자진해 나섰다.

"북한은 박정희 접촉의 성공여부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보내더라도 절대 다치지 않을 인물을 보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이때 黃이 '내가 한번 가 보겠다' 고 자원했답니다.

" 이 증언은 김중종이 61년 남파됐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그곳에 수감돼 있던 黃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후일담이다.

최소한의 안전보장을 믿었다는 황태성. 그러나 그의 서울 잠입은 가뜩이나 사상문제로 곤란에 처해있던 박정희장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 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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