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아직도 '우물안 개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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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얼마전 미도파에 적대적 기업인수.합병 (M&A) 이 벌어지자 재계가 온통 난리법썩을 떤 적이 있다.

해당그룹은 물론 재계가 공동전선을 펴면서 당시의 M&A를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인수를 희망했던 사람들은 '부도덕' 한 세력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들 한치 앞도 못내다 봤음이 이내 드러났다.

미도파를 지키다 지친 대농그룹 전체가 불과 몇달후에 부도유예협약에 들어간 것이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그 때 미도파를 적당한 가격에 넘겼었더라면 나머지 계열사들은 지킬 수도 있었을텐데…" 라고 뒤늦게 대농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앞으론 이같은 일이 언제 어디서 또 벌어질지 모를 세상이 바로 코앞에 닥쳐오고 있다.

내년이면 다자간투자협정 (MAI) 이 타결되고, 이에따라 외국의 큰손들이 국내기업을 넘볼수 있게끔 M&A의 장벽이 본격적으로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듣도 보도 못한 외국 기업이 국내기업을 덥썩 사들이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실감하고 미리 대비하는 기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기아그룹 사태가 이같은 무지 (無知) 현상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미국 정부가 채무보증을 선 79년의 크라이슬러 방식이 거론되는가 하면, 각계에서 노골적으로 정부에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정부가 개별기업에 지원할 수 없도록 못박은 세계무역기구 (WTO) 체제가 출범한지 3년이 지났지만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것같다.

선진국들은 눈에 불을 켜고 기아그룹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한국정부가 개입한다는 꼬투리만 잡으면 WTO규범을 걸어 세계적 통상문제로 부각시킬 작정이다.

그렇지않아도 껄끄럽던 우리 자동차산업을 이참에 고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한보사태수습도 마찬가지다.

여차하면 포철을 비롯한 한국의 철강업계에 즉각 '수갑' 을 채울 요량으로 트집거리 찾기에 열심이다.

그런데도 기업의 대응자세나 일반여론은 국민기업이니, 경제민주화니 하며기아살리기 캠패인을 벌이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세계의 무역환경 변화와는 전혀 담을 쌓고 살겠다는 식이다.

정부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이 터지니까 이제와서 WTO규범에 저촉되는 정부 지원이 무엇인지, 또 괜찮은 것은 무엇인지를 부랴부랴 검토하고 있다.

WTO체제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그동안 각종 규제를 서둘러 없애고,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했어야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는게 엄연한 현실이라면 지금이라도 세계 규범의 틀속에서 현명한 대책을 세워야할 때다.

바깥의 눈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됐다.

고현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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