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北送 일본인 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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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6년 5월 재일 (在日) 거류민단이 창단 4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사는 일본인 처 19명을 일본에 초청한 일이 있었다.

같은 처지의 2천여명 가운데서 선발된 이들은 주로 고령자와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었고, 집단적인 고국방문은 그나마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들의 국적 (國籍) 상황은 한국이 6명, 일본이 7명, 한.일의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이 6명이었다.

국적이야 어떻든 이들이 일본태생의 일본민족인 것은 틀림없는데도 수십년만에 고국을 찾은 이들을 맞는 일본사람들의 시선은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한.일관계의 복잡한 양상도 작용했겠지만 일부 일본인들의 머리속에는 '북송 일본인 처' 에 대한 생각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고령자와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북한에 사는 일본인 처보다는 훨씬 행복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59년 8월13일 일본과 북한의 적십자사가 인도주의를 내세워 이른바 '캘커타 협정' 을 맺은 후 첫 북송선이 니가타 항을 떠난 것은 그해 12월14일이었다.

그때 국내의 신문들은 그것을 '지옥여행' 이라고 표현했지만 일본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선전대로 '지상의 낙원' 은 못되더라도 역시 '사람 사는 곳' 이 아니겠느냐는 안이한 생각에서 그저 '남편만 믿고' 북송선을 타는 일본인 처를 무심히 전송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84년까지 북한에 간 일본인 처는 1천8백여명에 달했으나 북한에 가는 것이 생이별이 되리라고 믿은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돈을 보내달라거나, 일본 상품을 부쳐달라는 구걸편지가 온 예를 빼면 그 대부분이 생사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모범 일본인 처' 를 선발해 선전에 이용하는 등의 사례가 바깥 세상에 알려졌을 때에야 북송 일본인 처의 문제가 심각함을 깨달았으니 어리숙했다고나 할까. 북한은 대일 유화 제스처로 이따금 그들의 고향방문을 허용할 뜻을 밝히곤 했지만 그렇게 되면 북한의 이미지에 먹칠할 것이 뻔한즉 성사는 여전히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대북 식량지원문제와 맞물려 8월중 15~20명을 일시 귀국시키겠다는 이번 북한의 제의도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측이 그들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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