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신장석 신덕왕후 587년의 긴 수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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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울 도심의 지명 하나 - 광교 사거리. 조흥은행 본점과 영풍문고가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곳. 그런데 다리는 어딜 갔는지 없고 네거리엔 차량만 즐비하다.

사실 그 밑은 청계천. 50년대 복개공사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난 94년 조흥은행 옆에 축소.복원된 옛 광통교 (廣通橋)가 잊혀진 역사를 더듬게 한다.

다리 밑의 석축부분을 자세히 내려다 보면 무슨 조각품같은 게 있다.

바로 정릉을 둘러싸고 있던 신장석이다.

당대 최고의 돌 작품이 묻혀 있는 게 아쉬워 비슷하게 새겨 넣은 것이다.

잠시 연대기를 적자. ▶1396년 (태조 5년) - 계비 신덕왕후 별세 : 태조는 죽은 왕비의 능을 경복궁 망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지금의 정동에 묘를 쓰도록 하고 능호를 정릉 (貞陵) 으로 정함. 도성 안에 묘를 조성하는 법이 없다던 신료들의 만류는 끝내 허사. ▶1408년 (태종 8년) - 태조 74세로 서거 : 꿈에도 그리던 여인의 곁으로 갔으니 그리 애통하지만은 않았을 터. "임금이 정릉에 거둥하다" 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수없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1409년 (태종 9년) - 태종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의 정릉을 파서 옮기도록 조치 : 다시 조선왕조실록 -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산 (沙乙閑山 :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으로 당시 양주군) 으로 천장하다.

" 이복동생 방석과의 세자책봉 갈등을 빚었던 상대방으로서 보복같은 것이었을까. 제사마저 폐했던 사연에서 그런 암시를 읽을 만하다.

▶1410년 (태종 10년) - 광통교 복원에 능석 (陵石) 사용 : 대홍수로 청계천이 넘쳤다.

토목교였던 광통교는 또 떠내려갔다.

다시 조선왕조실록 - "광통교의 흙으로 만든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어 통행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다.

" 이에 정동에 나뒹굴고 있던 신덕왕후 능석을 석재 (石材) 로 썼다.

예전엔 사람들의 발길, 요즘은 차량의 바퀴에 무수히 짓밟히는 광통교 밑바닥의 신장석. 지금도 신덕왕후의 원혼이 신음을 흘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얼마전 그 돌 조각품을 건져내자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광교를 오가는 차량을 통제하기 어려운데다가 서울시 예산마저 달려 그냥 표류중이다.

아니 정확히는 청계천 복개공간의 어둠과 폐수 속에 갖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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