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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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방을 나서기 직전, 나는 검푸른 어둠을 머금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그것과 마주보고 앉아 보낸 무수한 밤과 낮, 그것과 마주보고 앉아 만들어낸 헤아릴 수 없는 문장들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고뇌와 성취, 비상과 추락의 시간이 아로새겨진 내 영혼의 앨범이라고 믿었던 그곳에는 이제 깊고 깊은 침묵의 그늘이 검푸른 어둠으로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대, 결별의 그늘에서 홀로 빛바래는 추억을 보라. 끝없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듯한 모니터가 안쓰럽게 보여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오래된 추억과 손을 잡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짙푸른 빛이 갑작스럽게 화면에서 터져 나왔다.

곧이어 내가 남긴 마지막 족적처럼 중도에 집필을 포기한 소설의 파일이 화면의 중앙으로 떠올랐다.

첫사랑 느닷없이 과거의 덫에 치인 사람처럼 나는 불가항력적인 심정이 되어 파일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작업이 진행되던 마지막 부분에서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매일을 이와같은 상태로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커서가 연해 깜박거리며 연재를 중단하기 직전의 마지막 부분에다 나의 시선을 비끄러매려 했다.

- 선생님……애인 있나요. 기나긴 겨울밤,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일 때마다 귓전으로 바람소리가 밀려들곤 했다.

세상을 휩쓸고 가는 듯한 그 공허로운 바람소리 때문에 나는 오래오래 숨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이 내가 당도해야 할 목적지가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막막함을 밝혀주는 빛이 될 것 같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 사라져버린 길이 되어 내 단절감을 말끔하게 해소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열여덟, 그래 그때 나는 고작 열여덟이 아니었던가.

방에서 나오자 마자 나는 장흥의 레스토랑으로 예약 전화를 했다.

그리고 생일인 사람과 동행하니 샴페인을 준비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뒤에 하영에게 전화를 걸어 열두시 정각에 명동성당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상처를 입고 쫓기는 사람처럼, 그리고는 서둘러 집안 청소를 하고 샤워를 했다.

하지만 과거의 분묘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던 과거의 실체는 청소로도 샤워로도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글=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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