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선 한국 못 잡아’… 일·대만 반도체 합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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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반도체 업계에 한국을 겨냥한 일본·대만 ‘D램 연합군’이 결성될 조짐이다. 성사되면 약체들이 대거 정리되면서 D램 업계는 ‘1강 3중’ 구도로 말끔히 재편된다. 한국 업체들에 비해 기술력이 달려 ‘찻잔 속 태풍’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덩치를 키우면 한국에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힘 모으는 일본·대만= 일본 엘피다는 대만의 파워칩·렉스칩·프로모스와 회사를 통합 운영하는 데 합의했다고 11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보도했다. 이들은 내년 3월까지 통합 작업을 완료하며, 이달 말에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 발표할 예정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블룸버그통신도 이날 사카모토 유키오 사장을 비롯한 엘피다 경영진이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서 정부 쪽 인사를 만나 대만 메모리 업체와의 통합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통합의 형태는 아직 확실치 않다. 일단 지주회사를 설립한 뒤 엘피다와 렉스칩을 그 밑에 두고 다시 파워칩과 프로모스를 렉스칩 밑에 두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이야기 정도가 나온다. 대만 디지타임스는 “대만 정부는 엘피다 지원을 결정하지 못했다”고 유보적인 보도를 했다.두 나라의 반도체 협력 움직임은 있지만 성사되려면 난관이 많다는 것이다.


일본 메모리 업계가 외국기업과 합작회사 설립이 아닌 직접적인 회사 통합 운영에 나서는 건 처음이다. 그만큼 상황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D램 값은 1년 새 10분의 1로 곤두박질쳐 업계는 극심한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 3위 D램 업체인 엘피다는 지난해 4분기에 618억 엔(약 9300억원)어치를 팔아 무려 579억 엔(약 8700억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대만 정부는 적자가 쌓여만 가는 D램 업계에 700억 대만달러(약 2조8000억원)의 공적자금을 수혈할 생각을 하고 있다. 프로모스는 14일 전환사채 발행에 실패하면 당장 파산할 처지다. 영업손실률이 100%를 넘는 난야는 미국 마이크론과 합병을 검토 중이다. 업계 5위인 독일 키몬다는 지난달 이미 파산을 신청했다.

◆경쟁력은 미지수=통합 업체가 출범하면 외형 면에서 하이닉스반도체를 제치고 D램 업계 2위에 올라선다. 미국의 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1위는 삼성전자(30.3%)였다. 엘피다와 파워칩의 합작사인 렉스칩을 제외해도 일본·대만 연합의 점유율은 22%를 넘어 하이닉스(19%)를 웃돌게 된다. 점유율 15%인 마이크론·난야 연합과 함께 ‘1강 3중’ 구도를 형성한다. 외국 업체들이 일본과 대만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구조조정과 미세공정 전환에 나설 경우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도 안심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영주 우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네 회사가 무리 없이 합쳐지면 향후 수년간 국내 D램 업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면 기술력이 달리는 업체끼리 합쳐 봤자 시너지가 크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1999년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전신)는 LG반도체를 전격 합병해 세계시장 점유율 22%를 넘어서면서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을 제치고 단숨에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인수 과정에서 진 부채 부담과 D램 경기 급랭에 발목을 잡혀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때 D램 분야 1위였던 일본 NEC도 99년 히타치와 합병해 엘피다를 설립했으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시장점유율 5위권에 머물렀다. 김성인 키움증권 연구위원은 “대규모 장치산업인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선 요즘처럼 공급과잉일 때 회사를 합치면 전체 생산량이 개별 회사 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줄어든다”고 말했다. 효율이 낮은 생산라인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과잉공급이 해소되고, 한국 업체들의 시장지배력이 강화되는 호기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앞선 기술도 ‘연합군’에 대항할 무기다. 두 회사는 올 3분기부터 40나노급 D램 양산에 들어간다. 대만 업체들과의 기술격차가 2년 정도 벌어지게 된다. 엘피다조차 한 단계 뒤진 50나노 제품 양산에 들어가지 못했다. 김종갑 하이닉스 사장은 “중장기적인 기술·원가 경쟁력이 중요하다. 규모의 이점을 살리려는 전략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김창우·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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