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문제 사전차단이 미국경제 강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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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다우존스 주가가 8천을 넘은지 이틀뒤인 18일 (현지시간) , 미국 경제계에는 유난히 굵직한 뉴스들이 많았다.

1911년에 창업, 86년간 헥킨저 집안에서 경영해오던 대형 체인점 '헥킨저' 가 미국내 매장 1백17개를 캘리포니아의 한 투자가에게 매각키로 했다는 뉴스가 우선 컸다.

매각가는 5억7백만 달러. 우연의 일치지만 같은 날 미국인들에게 더 친숙한 잡화전문점 체인 '울워스' 도 35개주에 퍼져있는 4백개 점포의 문을 내달중 일단 다 닫은 뒤 특화된 1백개 점포만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879년에 펜실베니아에서 처음 문을 연 울워스는 미국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 성장해온 대표적인 잡화점으로 총 9천명에 이르는 종업원들은 이제 다들 새 일자리를 찾아야하게 됐다.

같은 날 뉴욕 월가에서는 AT&T의 회장 존 월터가 취임 8개월만에 전격 해임됐다는 뉴스가 화제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사세가 기울고 있는 AT&T를 끌고가기엔 자질 부족이라는 주주들의 따가운 비난이 그를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만들었다.

대형 체인점들이 문을 닫거나 새 주인에게 넘어가고 최고경영자가 하루 아침에 자리를 내놓고 하는 일들은 분명 밝은 뉴스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역설적으로 주가 8천시대를 구가하는 미국 경제의 장기 호황을 밝혀주는 '가장 밝은' 뉴스다.

미국에도 물론 막판까지 가다가 도산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제의 군살' 들은 헥킨저나 울워스처럼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미리 미리 제거된다.

헥킨저는 지난해 22억달러의 매출을 올렸으나 2천5백만달러의 적자를 냈다.

울워스는 지난해 3천7백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입었다.

외형이나 덩치로 보면 이 정도의 적자는 충분히 안고 갈 수 있을 법도 한데 미국의 '기업 시장' 은 그냥 놔두지를 않는다.

10년전 26.5달러까지 갔던 헥킨저의 주가는 최근 2달러선에 가 있다.

그런가하면 울워스가 점포문을 닫는다고 발표한 당일 울워스의 주가는 2.5달러나 올라 27달러 선이 됐다.

AT&T의 최고경영자를 물러나게 한 것도 영 맥을 못추는 주가였다.

매일 매일의 주가에 울고 웃는 미국식 기업 경영은 '장기 비전' 이 결여됐다는 비판은 이제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가에 의해 바로 바로 재단 (裁斷) 되는 미국식 '군살 빼기' 가 오늘의 미국 경제를 일궜다는 자신감이 미국 경제계에는 충만돼있다.

시장만이 아니라 대내외 정책으로도 미국은 경제의 군살을 미리 빼는데 매우 열심이다.

냉전이 끝나고 군수산업의 수요가 줄어들자 미 국방부가 보잉.MD의 합병등을 앞장서 유도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연방거래위원회 (FTC)가 이를 승인한 데 이어 클린턴까지 나서서 '무역보복 불사' 를 외치는 것을 보면 미국이 아주 잘 '계획된 경제' 를 끌고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과 한국은 물론 상황이 다르다.

예컨대 정확한 기업 회계나 신뢰할 수 있는 기업 정보등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미국식 '주가 재단' 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보.삼미에 이어 기아에 이르기까지 다들 갈 때까지 가서야 문제가 터져나오는 것을 보면 '미국식 부실기업 정리' 의 원리를 한국 시장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은 매우 시급하다.

워싱턴 =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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