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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 가이드라인 나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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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연명치료 중단(존엄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처음으로 나왔다. 식물인간 상태인 김모(76·여)씨와 가족들이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 등 청구소송’ 의 항소심에서다. 그동안 존엄사와 관련된 명확한 기준이 없어 의사들은 환자가 숨질 때까지 방어 진료를 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 이인복)는 10일 환자 측의 요구를 인정한 1심 판결(지난해 11월 28일)을 인용하면서 호흡기 제거와 관련한 네 가지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는 사망 과정에 진입했고 ▶환자에게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 중단 의사가 있어야 하며 ▶연명을 위한 치료만 중단(고통 완화나 일상적인 치료는 중단할 수 없어)이 가능하고 ▶치료 중단은 반드시 의사가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무분별한 생명의 단축이 허용될 수는 없으므로 연명치료의 중단은 이처럼 엄격한 요건이 충족되는 경우로 제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부장은 “이 같은 요건과 절차는 법률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법률 규정이 없더라도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 산소호흡기 제거가 가능한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또 “안락사란 용어는 역사적으로 잘못 사용된 사례가 있어 오해 가능성이 있고, 존엄사는 죽음에 대한 미화 가능성이 있어 이번 판결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부장은 이날 판결문 외에 따로 준비한 ‘당부의 말씀’을 통해 “이번 판결이 병상에서 회복에 힘쓰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의 노력을 불필요하다고 치부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보건의료연구원 허대석(서울대 의대 교수) 원장은 “방어적 판결만 했던 과거와 달리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판결”이라며 “그러나 이번 판결을 일반화하기는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존엄사법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 김씨는 지난해 2월 폐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폐 조직검사를 받다 과다 출혈에 따른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김씨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소송을 냈고, 서울서부지법은 국내 사법 사상 최초로 호흡기 제거 판결을 내렸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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