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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고함(孤喊)] 정조의 탈권위주의와 공자의 파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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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上)와 성인 공자(下)는 권위주의를 벗어나 진솔하게 대화하는 자세를 지닌 슬기의 선현이었다. [중앙포토]

 공자는 결코 귀한 신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송(宋)의 후예로서, 몰락한 집안의 무사였다. 공자의 키가 2m 넘는 특이한 몸을 지니게 된 것도 거구의 무인 아버지 숙량흘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숙량흘은 70세가 되어서야 곡부의 무당 집안의 새악시 안씨녀(顔氏女)와 결합한다. 권위를 자랑하는 중국 최초의 정사(正史)인 사마천의 『사기』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숙량흘은 안씨녀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여기서 야합(野合)이란 무슨 뜻일까? 문자 그대로 풀면 “들에서 합한다”는 뜻인데 제대로 된 혼례를 치르지 않고 이들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70세 늙은 무사와 16세 꽃다운 여인이 복사꽃 향기 흐드러지는 니구산(尼丘山)에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비는 태고의 낭만이 『사기』에는 아련하게 기록되어 있다. 3년 후 숙량흘은 이승을 떴다.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그러니 소년 공자의 삶이 순탄했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암시하는 진실된 이야기가 공자 자신의 말로서 『논어』에 기록되어 있다. 공자 69세 때 일이었다. 그러니까 공자가 기나긴 유랑을 끝내고 노나라로 귀국한 이후의 사건이다. 오나라의 사신인 태재(大宰·수상)가 공자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子貢)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공자는 참으로 성인이시군요. 어떻게 그토록 재능이 다방면으로 넘치시나이까(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자공이 그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자기 선생을 극찬하는 것이었다. “그럼요. 진실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에 따라 우리 공자님을 성인으로 만들려 하시니, 또한 그토록 많은 재능을 주셨습니다(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후일에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태재, 그 사람이 나를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비속한 잔일에 재주가 많을 뿐이로다. 군자가 재주가 많아야 할까? 그렇지 아니 하니라(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여기 공자의 고백은 너무도 진실하다. 자기의 재능을 칭찬하여 성인으로 추앙하려는 사람들의 담론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내가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것은 어려서부터 천하게 컸기 때문에 이것저것 안 해본 짓이 없기 때문일 뿐이라고, 자기 인생을 진솔하게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소야천(吾少也賤)”을 말하는 공자의 위대한 인격에 고개를 숙인다.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떠한 성인도 공자처럼 솔직한 인간은 없었다.

이렇게 천하게 큰 공자가 어떠한 계기로 그토록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까. 공자가 자기 인생을 회고하는 언사에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사랑하는 엄마를 또다시 떠나보내야만 했던 17세 때의 사건으로 다음과 같은 고사를 실어놓고 있다.

공자는 모친 상중이었는데,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부 계손씨(季孫氏)가 선비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공자는 자신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잔치에 참석하고자 계씨의 집으로 갔다. 당시 계씨의 가로(家老)로서 양호(陽虎)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양호는 공자를 보자마자 문전에서 박대하는 것이었다.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고자 하는 것이지, 너 같은 녀석을 대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季氏饗士, 非敢饗子也).” 이에 공자는 치욕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孔子由是退). 사마천의 기록에서 단지 “향사(饗士)”와 “향자(饗子)”가 대립되고 있을 뿐 그렇게 공자가 모욕을 당해야만 했던 내면적 상황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공자가 상중이었기에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상복 차림으로 잔치에 가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을 수 있다. 둘째, 공자가 15세나 17세경의 어린 나이였다면 아직 사관례를 거치지 않은 미성년이었다. 그렇다면 관도 쓰지 못하는 공자가 선비의 잔치에 간다는 것은 좀 어색한 상황이었을 수 있다. 셋째, 사(士)라는 의미에 특별한 계층적 의미가 들어갔을 수도 있다. 공자는 천한 신분의 사람이었으므로 사계급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계급 사람들을 위한 잔치에 너같이 천한 녀석은 참석할 수 없다’고 면박을 당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사례를 참작해 볼 때 공자는 어려서부터 매우 도전적이고 독립적이고 맹랑한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를 내친 양호(陽虎)의 행동을 우리는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호의 문전박대는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잊지 못할 치욕이고 좌절이었으며, 극복되어야 할 많은 문제의식을 던져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예(禮)란 과연 무엇인가? 상복 차림으로 잔치에 갈 수 없다는 규율은 누가 정한 것인가? 나이가 어리다고 꼭 그렇게 박대받아야 할 것인가? 사관례란 무엇인가? 선비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과연 고정된 계급일까? 나는 왜 선비의 자격이 없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이 어린 공자의 마음에 용솟음쳤고, 결국 공자의 일생이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고 도전하는 삶이었다. 우리 한국인의 삶 또한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고 좌절 속에서 솟아오른 역사의 여정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엊그제 공개된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의 세계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다.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정조의 어찰에는 적나라한 인간의 감정이 노출되어 있다. 자기 아버지의 죽음에 찬동한 정파와 사감을 떠나 그 능력을 인정하고 긴밀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권위주의를 벗어나 진솔하게 대화하는 정치, 그 모습의 원형은 이미 공자의 모습 속에 들어 있었다. 이 모두가 우리가 새롭게 배워야 할 선현들의 슬기가 아닐까.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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