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첫사랑…요?"

입을 반쯤 벌리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기자는 나를 보았다.

그래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사랑의 순서 따위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과거의 젊은이들에게는 그 '첫번째' 라는 의미의 고결성이 평생을 좌우할 정도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걸 일깨울 수 있는 자전소설을 쓰고 싶다는 게 솔직한 나의 결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거칠대로 거칠어진 세상, 그 바탕에 어쩌면 첫번째를 중시할 줄 모르는 사회적 풍조가 깔려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네고 나서 나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건너다 보았다.

"결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님의 의사를 데스크에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내부 결정이 내려지는 대로 다시 전화를 드리죠. " 어떤 우여곡절의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렇든 그날로부터 닷새가 지난뒤에 나는 신문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부 결정이 내려졌으니 이제부터 연재를 준비해 달라고 기자는 다소 고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기간은 1999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일년간 고생 좀 해 달라는 말을 덧붙이고 나서 기자는 전화를 끊었다.

첫사랑. 그렇게 해서 나는 소설가가 된 이후 최초로 자전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과 나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감과 불화감의 실체를 향해 힘겹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마음의 정글, 그 가장 깊은 오지에 불가침의 성역으로 자리잡고 있는 에메랄드 궁전을 향하여. 하지만 1999년으로 접어들자마자 이 세계는 예언 적중률 99%가 넘는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인류 멸망 예언을 놓고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들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과거를 통해 역으로 현실을 되짚어보겠다던 나의 애초 의도는 초장부터 곤욕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1999년 안에 지구 최후의 날이 도래한다는데 태무심하게 앉아서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일에 열중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작태란 말인가! 1999년 7월, 세기말이 아니라 종말을 향한 집단적 광기에 질려버려 나는 연재를 중단하고 동시에 절필 선언을 해 버렸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다시말해 더이상 물러서거나 비켜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려 내 스스로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글렀어, 글렀어, 글렀어, 하는 말을 세번씩이나 되풀이하고 나서 서늘한 마음의 냉기를 느끼며 '연재 중단의 변 (辯) , 그리고 절필 선언' 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파 (作破)!

<박상우 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