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붕괴 따른 위험부담 덜기 - 미국 정가 對北 경제접근론 왜 나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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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억제를 넘어서(beyond deterrence)'.

지난해 10월 제임스 레이니 당시 주한 미대사가 아시아 소사이어티 연설에서 처음 썼던 말이다.“막무가내의 북한 억누르기만으로는 안된다”는 뜻의 이 말이 요즘 워싱턴의 대북(對北)논의와 관련해 새삼 조명받고 있다.

북한 핵개발 억제,대북 식량지원에

이어'대북 경제접촉'논의가 확연히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변화는 공식적으로 언급될 성질의 문제가 물론 아니다.그러나 워싱턴의 대외정책은 미리 감지(感知)되는 것이 보통이다.주요 세미나,유수의 싱크탱크,상대국 인사들과의 접촉등을 통해 정책의 줄기가 잡혀가기 때문이다.

지난달 12일 워싱턴 소재 전략및 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북한 다루기'세미나가 바로 그런 자리중 하나였다.이날 세미나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커트 캠벨 미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보의 발언이었다.

그는 우선“핵문제 논의,북한에 대한 부분적 지원과 함께 현재의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면 북한은 결국 파격적인 변화가 불가피한 지경에 이르고 이때 한.미 양국은 위기대처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가장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로 제시했다.이런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남한을 비롯한 대북 경제접촉 확대는 정치.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적 방법이다.

또 통일 이후 남한 혼자선 대처할 수 없는

경제상황을 미국등 우방뿐만 아니라 세계은행등 국제금융기구들의 참여를 통해 지금부터 풀어가야 한다.” 미 정부내의 이같은 기류는 지난달 16일 워싱턴을 방문했던 김기환(金基桓)대외경제협력대사에게도 전달됐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의 샌디 크리스토프 아시아 담당 보좌관,캠벨 부차관보등을 만난

金대사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두가지 미국측 판단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하나는 여전히 북한의 식량이 부족하긴 해도 위기상황은 넘겼다는 판단,또 하나는 경제분야를 포함한 포괄적인 대북논의가 절실해졌다는 판단이다.

워싱턴 정.관가의 동향에 밝고 영향력이 큰 프레드 버그스텐 세계경제연구소(IIE)소장이 9월초 북한경제를 주제로 한 대규모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평소 한국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경상적자나 부실기업이라기보다 '통일 대비'라고 지적하는 버그스텐 소장은 이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양수길 원장과 이 문제를 깊게 논의했으며,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워싱턴에 설립한 한국경제연구원(KEI)이 IIE와 함께 세미나에서 다룰 구체적인 문제들을 정리하고 있다.

워싱턴의 북한 전문가들이나 국제기구가 경제분야에서 북한을 국제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그러나 북한 핵문제가 심각해지고 식량난까지 겹치자 발등의 불을 끄느라 별로 무게가 실리지 못하던 대북 경제문제가 이제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워싱턴=김수길.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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