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 디자이너 대유공전 광고디자인과 '한재준' 교수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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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군대생활의 기억은 대개 고달픔으로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아픈 기억도 빛바랜 군복처럼 흐려지게 마련이지만,그래도 그 시절을 웃음으로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유공업전문대학 광고디자인과

한재준(40)교수는 육군병장 시절이 좋았다.

격변의 80년,홍익대 미대 학생회장과 총학생회 대의원회 부의장으로 군사정권에

돌을 던졌던 그가 군복을 입고 행복했다니-.'한글'덕분이었다.길고 아득한 시간을 쏜살같이 만들어 준 것이'ㄱㄴㄷㄹ'이었다.

한교수는 군대에서 글자만 팠다.

미대 출신 신병에게 으레 쏟아지는 질문.“너 그림 잘 그리지?”그는 항상 고개를 저었다.그리곤 말했다.“글씨는 자신있어요.” 결국 그가 이겼다.사단의 모든 글자가 그의 손을 거쳐갔다.병장땐 눈감고도 칼로 글자를 파낼 경지에 이르렀다.보통 사람에겐'단절'을 뜻하기 일쑤인 병역의무가 그에겐'연속'이었고'심화'였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의 대학시절 고민은 늘 한가지였다.회화의 순수성과 디자인의 대중성을 둘 다 갖고 싶었다.

그때 그에게 다가선 것이 문자 디자인이다.그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에서 추상예술의 아름다움을 읽었다.“나의 오랜 고민은 의외로 쉽게 풀렸습니다.내가 갈망했던 미(美)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거죠.”한글을 조합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작 품재료로 쓸 자신만의 폰트(글꼴)를 그려내면서 글자의 매력에 빠져들 즈음 영장이 나왔다.남다르게 행복했던 현역 시절-.제대 후 그는'한글 만들기'에 가속도를 붙였다.

88년 그가 안과의사이자 한글기계화 운동가인 공병우박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제가 그린 문자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젊은 미술인의 한글 사랑이 기특했는지

공박사님은 과분한 은혜를 베푸셨죠.”한교수는 공박사에게 컴퓨터를 배웠다.그의 작업이 제도대에서 키보드로 옮겨간 것도 그때였다.공박사와 함께 일을 하면서 목표는 뚜렷해졌다.한글의 틀을 정보시대에 맞게 혁신하면서 균형의 미를 찾자는 것이다.

“전통적인 폰트를 컴퓨터 시대에도 고집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강'이라는 글자를 입력할 경우,자판 하나를 누를 때마다 기역자의 크기가 달라지면서 눈에 무리를 주지요.같은 자음의 모양을 수십가지 만들어야 하는 것이 기존 시스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박사와 머리를 맞대고 폰트를 만들었다.90년초 두 사람의 성을 딴'공한세벌체'가 탄생했다.이 글꼴은 공병우박사가 고안한'세벌식'자판(키보드에서 초성.중성.종성의 영역이 각각 다름)용으로 기존 폰트 한벌의 문자수 2천3백50개를 60여개로 줄인 파격적인 것이었다.

한교수는'문학정신'이란 잡지의 일부를 공한세벌체로 인쇄해 세상에 공개했다.반발이 거셌다.호의를 보인 사람들조차'시에 한해 시범적으로나 적용이 가능한 글꼴'이라는 의견이었다.그리고 7년-. 이제 공한세벌체는 우리의 눈에 익숙할 정도가 됐다.광고에서,잡지에서 그의 글꼴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올초엔 대표적인 워드프로세서'글'에 등록됐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세벌식 자판의 개선등 공박사님이 못다 이룬 뜻을 계속 추구해 나가야죠.”아직도 한교수의 꿈을 향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또 다른 전환점이 있을까.모든 것은 오직'한글 만들기'로 통할 뿐이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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