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머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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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기욱이 15층으로 올라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조간신문을 보고,청소를 하고,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베토벤의 '황제'를 듣고 있을 때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부석부석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같은 오피스텔의 7층으로 그가 이사를 온 것은 지난 연말,그러니까 서른 일곱에 감행한 늦은 결혼을 단 5개월만에 파경으로 끝장낸 직후였다.10년 넘게 유지해 온 친분,나의 절필과 이사,그의 파혼과 정신적 혼란-아마도 그런 것들이 뒤섞여 유유상종을 더욱 부채질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그것이 소설이었건 결혼이었건,어쨌거나 각자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한 부분씩을 끝장냈다는 동병상련의 유대감 같은 걸 그와 나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젯밤엔 대체 어떻게 된 거유?” 소파에 몸을 던지자마자 그는 담배부터 피워물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견디기 힘들어서 그냥 집으로 왔지 뭐.그래,넌 즐거웠냐?” 헐렁한 반팔 남방에 낡은 청바지,다리를 꼬고 앉아 맨발을 흔들어대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가면 간다고 말을 해 줘야지,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면 난 어쩌란 거요? 형이 먼저 갔기 때문에 내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타락했다면 기분 좋겠수?”“나 때문에 타락을 했다구? 그럼 오히려 나에게 감사를 해야겠군.그런 곳에 타락하러 가지 않으면 개과천선하기 위해 가겠냐?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다만 내 자신일 뿐이었어.난 익숙하지 않는 건 잘 못 견디잖아.새로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질,몰라서 하는 말이야?” 애초부터 그런 곳에 나를 데려간 게 잘못이었다,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암튼 난 어젯밤에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니까 이젠 그 얘긴 그만합시다.얘길 오래 끌면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게 될 거요.”“흠,아주 대단했었나 보지?”“그래요,대단했었죠.나중에 룸에 들어가서 상대방 여자의 가면까지 찢어 버리고 따귀까지 얻어 맞았으니… 말 다한 거 아뇨?”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항상 말하잖아.넌 성공했다 싶을 때 항상 방심하면서 술에 먼저 거꾸러지는 게 탈이라고 말야.팔부 능선까지 힘겹게 기어올랐다가 한순간에 발을 헛디뎌 정신없이 밑으로 굴려내리는 형국이란 말야.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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