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때마다 고개 내민 ‘경제 아편’… 경기 회복의 덫 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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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트와 홀리가 되살아나나’.

리드 스무트와 윌리스 홀리 전 미국 의원은 1930년 자신들의 이름을 딴 관세법을 발의했다. 2만 개가 넘는 수입품에 최고 48%의 관세를 매기게 한 이 법은 훗날 대공황을 전 세계로 확산시킨 도화선으로 꼽혔다. 미국이 관세를 무기로 자국 산업 보호에 나서자 유럽 국가도 보복에 나서면서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한 것이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스무트와 홀리로 상징되는 보호주의의 유혹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를 비롯한 주요 언론이 3일 보도했다. 심지어 리처드 피셔 미국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보호주의를 “경제의 아편”이라고까지 비유했다.

◆교묘해진 보호주의=30년대 보호주의는 관세에 집중됐다. 수입품에 턱없이 높은 관세를 매겨 시장 진입을 원천 봉쇄했다. 노골적인 보호주의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아픔을 겪고 난 뒤에야 세계 각국은 무역장벽을 규제하고 나섰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서 출발한 이 움직임은 세계무역기구(WTO)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WTO는 국가 간 분쟁에 대한 중재는 물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국가에 대한 제재 권한까지 갖춰 보호주의가 설 자리도 그만큼 좁아졌다.

그러나 불황이 깊어지자 WTO의 권위도 흔들리고 있다. 세계 각국이 WTO가 금지하고 있는 고율 관세 대신 자국 산업 우대 조항이나 반덤핑 관세 부과와 같은 허점을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통상 전문 변호사 게리 호릭은 “그동안 거의 쓰이지 않아 고치지 않았던 WTO 규정의 허점이 (최근의 보호무역 조치에)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호주의 확산을 주도하고 있는 건 미국이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11월 자국의 빅3 자동차 회사에 구제금융을 대주자 독일·스웨덴도 자국의 자동차 회사 지원에 나섰다. 최근엔 미 하원이 819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 부양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미국산 사용 의무(Buy America)’ 조항을 넣어 유럽·캐나다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미국 상원은 한술 더 떠 정부 예산으로 추진하는 모든 사업에 미국산 제품과 장비를 사용하도록 의무화하는 조항까지 검토 중이다.

자국 산업 보호 움직임은 개발도상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인도는 최근 중국산 장난감 수입을 6개월간 금지시켰다. 중국산 장난감에서 납과 유독성분이 나왔다는 게 표면적 이유지만 사실은 인도 장난감 시장의 60%를 장악한 중국 제품을 견제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FT는 분석했다. 인도·러시아는 최근 철강·자동차 관세를 올리기도 했다. WTO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이후 세계 16개국에서 19건의 보호무역 조치를 새로 도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노동·금융시장에도 보호주의=지난달 28일 영국 링컨셔의 린지 정유공장에서 시작된 영국 노동자의 파업·시위는 전국 19개 도시로 확산했다. 이 시위는 이탈리아 기업이 링컨셔의 새 정유단지 건설사업을 수주한 데서 촉발됐다. 그동안 이탈리아·포르투갈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온 영국 노동자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전국적인 시위로 번졌다. 미국에서도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12개 은행이 외국인을 많이 고용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선진국의 금융 보호주의 움직임도 신흥국가엔 위협이다. 영국 고든 브라운 총리는 2일자 월스트리트 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선진국 은행이 신흥국가에서 돈을 빼고 있다”며 “이는 금융 보호주의의 첫 단계로 결국 과거 경험한 보호무역주의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금융 보호주의 확산으로 올해 신흥시장으로 유입될 민간 자본의 투자 규모는 2007년보다 82% 줄어들 수 있다고 WSJ는 분석했다.

정경민·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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