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궁전의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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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햇살 쏟아지는 녹색 테이블

내가 전망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은 내 인생의 전망을 스스로 포기하고 난 직후부터였다.반 년 이상 일간신문에 연재하던 장편소설을 갑작스럽게 중단하고,그것과 동시에 절필을 선언하고 나서 부랴부랴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그리고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직 전망 하나를 낙으로 삼으며 전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오피스텔 15층,전망 없는 전망대,그리고 절필 소설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5월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1999년 8월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떠들어대던 인간들의 광란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어느덧 서기 2000년 5월로 접어든 것이었다.지구의 종말을 안타까워하거나 그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오직 그것을 기다리며 살아온 것처럼 광기로 날뛰던 인간들도 지금은 저 잠잠한 풍경 속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달빛에 휩싸여 종말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터였다.사랑을 하고,결혼을 하고,아이를 낳고,이혼을 하고,돈을 벌고,돈을 쓰고,그러다가 힘에 부치면 홀로 눈물 지으며 자살을 꿈꾸기도 할 터였다.

오호라,무명초를 닮은 인생이여! 산뜻한 백색 유람선이 한강 선착장을 출발할 때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몰입해 있던 풍경의 세계에서 퍼뜩 깨어나며 나는 무척이나 쓸쓸한 표정으로 베란다에 앉아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보기 좋은 풍경에는 어김없이 마취 성분이 깃들어 있는 법이거늘 속수무책의 정서를 지닌 이십대도 아니면서 턱없는 감상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며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그런 뒤에 거실로 들어가 침대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무선전화기를 뽑아들었다.

“거기가 소설가 이본오 선생님 댁인가요?” 한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귓문으로 밀려 들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아무래도 잘못 걸려온 전화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나는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소설가 이본오 선생님'이라고 여자가 또박또박 말했기 때문에 잘못 걸려 온 전화일 가능성은 더욱 농후했다.아직도 내가 절필했다는 걸 모르고 원고 청탁을 하는 경우,아니면 절필 자체를 기사 거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잡지사의 인터뷰 요청 같은 것.“본인이신가요?” 나도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건만,그녀는 그것을 무시한 채 전화를 받고 있는 내가 누구인질 먼저 확인하고 싶어했다.내가 누구이거나 말거나,당신 이본오 맞아? 냉랭한 목소리 때문인가,그녀의 물음이 내게는 그런 식으로 해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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