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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범죄 은폐에서 더 큰 쾌감 얻었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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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03면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에 상냥한 말투, 보험금으로 타 낸 수억원대 재산, 네 번의 결혼’….

강호순은 ‘조직적·체계적 연쇄살인범’

강호순(38)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였다. 2006년 12월부터 2년여에 걸쳐 벌어진 경기도 서남부 지역의 부녀자 7명을 연쇄살인한 범인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강은 안산의 마사지업소 직원으로 일할 때 실력이 좋아 찾는 손님이 많았다고 한다. 지난여름엔 안산저수지에서 피서객들에게 음료수와 옥수수 등을 팔았다. 평소 모자를 눌러 쓰는 걸 즐겼다. 하지만 몇 차례 살인을 저지른 뒤 범행 현장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대담해졌다. 강은 범행 동기에 대해 처음에 “2005년 네 번째 부인이 화재로 사망한 이후 여자들을 보면 살인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31일엔 “성욕을 참지 못해서도, 돈 때문도 아니며 나 스스로 순간순간 끓어오르는 (살인) 충동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고 경찰이 전했다.

경기대 이수정(범죄심리학) 교수는 “강호순에게 성적 쾌락은 1차적인 동기였을 수는 있지만 최종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며 “더 큰 쾌감을 얻은 것은 결국 살인 행위와 이후 암매장을 통한 완벽한 범죄 은폐에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가정 내 폭력이 있어서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며 “평범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던 것 같고 풍파가 많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쇄살인범을 괴물이라고 보면 오산”
강은 연쇄살인을 통해 욕정(성적 만족)과 스릴(살인 쾌감)을 동시에 추구했다. 쾌락형으로 분류된다. 2004년 1월~2006년 3월까지 관악·구로·동작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부녀자 13명을 살해한 정남규에겐 스릴이 더 중요했다. 정은 2006년 4월 말 검거 직후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살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붙잡히지 않았다면 계속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프로파일링 인터뷰에선 “비 오는 날 범죄 충동이 컸고 절도·강간·살인 중에서 살인이 제일 짜릿했다”고 했다. 부유층 노인과 출장 마사지사 등 21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복합형이다. 욕정·스릴 외에 권력까지 세 가지 쾌락을 모두 추구하면서 부유층과 윤락여성을 단죄해야 한다는 사명의식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은 범행 후 사후 처리를 완벽하게 했다는 점에서 유영철과 비슷하다. 여성을 성적 충동을 해소하는 도구 정도로 여긴다는 점도 같다. 강은 ‘체계적·조직적인 성적 살인범’에 속한다. 강은 노래방이나 버스정류장에서 대상을 유인해 경기도 일대에 암매장했다. 자신의 안전지대로 데려와 살해할 만큼 주도면밀했다. 특히 융통성과 기동성이 강했다. 연말연시에 날씨가 추운 날을 택해 여성들이 자신이 범행에 이용한 차(무쏘·에쿠스)에 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강은 200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5명을 살해한 뒤 범행을 멈췄다. 그 후 1년10개월이 지난 지난해 11월과 12월 살인을 재개했다. 연쇄살인의 특징인 냉각기를 가진 것이다. 이 교수는 “강이 남겨 놓은 사건 현장과 범죄 패턴을 보면 상당히 체계적이고 치밀하다”며 “이런 범죄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웃에겐 친절하고 범행 대상에겐 냉혹한 이중적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연쇄살인범이 일반인들과 다르게 괴물이고 혼자 외롭게 살면서 비정상적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부연했다.
 
과거에는 ‘사회적 동기’ 많아
과거 한국의 연쇄살인범들은 세상에 대한 복수를 범행 이유의 하나로 내세웠다. 지존파 두목 김기환은 “입시 부정 등 가진 자들의 부정부패가 범행을 촉발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지존파 사건은 1994년 김기환 등 7명이 전남 영광의 외딴집에서 5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해한 뒤 그중 2명을 소각로에 태워 버린 사건이다. 검거됐을 때 방송사 카메라에 대고 “더 못 죽인 게 한이다”라고 외쳤다.

70년대 경기도 수원·평택 일대 시골의 외딴집을 돌며 17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김대두는 ‘묻지마 살인’의 원조로 꼽힌다. 90년대는 훔친 택시를 이용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며 ‘살인일지’를 썼던 온보현이 있었다. 2000년대엔 부산과 경남 일대에서 철강회사 회장 부부 등 9명을 살해한 정두영이 나타났다. 정두영은 동거녀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10억원을 모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범행을 시작한 ‘이득 추구(강도살인)형’이다. 유영철은 2004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 모두 어렸을 때는 가난에 허덕였고 커서는 범죄 전과로 인해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적응에 실패했다. 여기다 이상 성격으로 인한 이혼과 실연, 사람들과 사회에서 단절된 생활로 인한 외로움 등이 겹쳤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로 풀어냈다. 이들에겐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경찰대 표창원(행정학과) 교수는 『한국의 연쇄살인』이라는 저서에서 “사회적 스트레스가 개인적 문제와 결합하면 (연쇄살인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대부분의 연쇄살인 사건은 해결됐지만 86년 9월~91년 4월 사이 10건의 성폭행 살인사건(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공소시효는 2006년 4월로 지났다.

미국에선 대부분 성적 동기
‘둘 이상의 연이은 살인. 각각이 독립적인 사건일 것. 살인은 몇 시간 혹은 몇 년이 지난 뒤 일어날 수도 있음. 범행 동기는 심리적인 것이며 가학적인 성범죄 양상을 띰’.

미국 국립법연구소가 내린 ‘연쇄살인’의 정의다. 서구 연쇄살인범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심리분석관 로버트 레슬러가 80년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국 연쇄살인범의 특징은 ▶25~35세 사이의 백인 독신 남자 ▶심리적 문제가 있지만 지적 능력은 높은 편 ▶어릴 때 육체적 혹은 성적 학대 경험 ▶이성의 옷 조각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페티시즘, 엿보기 좋아하는 관음증, 폭력적인 포르노 집착 등이다. 사회적 동기로 연쇄살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FBI가 연쇄살인범 300여 명을 분석한 결과 64%가 성적 동기에 의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테드 번디’는 미국판 강호순이다. 시애틀대 법대 학생이었던 그는 소년같이 귀여운 외모로 여성 희생자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했다. 주차장이나 해변가에서 다친 척 도움을 청한 뒤 특정 장소로 유인해 살해했다. 인육도 먹었다. 73년부터 5년간 플로리다 등 5개 주에서 30명의 여성을 강간살해했다. 89년 사형당했다. 온보현 같은 택시운전사 연쇄살인범은 흑인 온 드로소(35)다. 2003년 1월부터 한 달간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임신한 젊은 흑인 여성 4명을 강간살해했다.

표창원 교수는 “동일한 유전적 요인을 갖고 있다 해도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면 피카소나 반 고흐 같은 천재적 예술가가 될 수 있는 반면 학대와 냉대의 세례를 받으면 연쇄살인범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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