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통속적인, 그러나 심오한 나쁜남자의 ‘막장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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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모범소설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박수현 옮김, 아르테, 222쪽, 1만원

 한 세기 전 철학자·소설가·시인으로 활동했던 스페인의 미겔 데 우나무노(1864∼1936)는 “모든 생명은 모름지기 반이성적이고, 모든 이성적인 것은 반생명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과 생명 사이의 대립이 “생의 비극적 감정의 기초를 이룬다”고 봤다. 대표작인 사상서 『생의 비극적 의미』, 장편소설 『안개』 등은 그런 ‘반이성주의’ 철학을 담아낸 것이다.

신간은 우나무노가 대선배인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동명 소설집에 착안, 소설을 통해 자신의 소설 이론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책에 실린 소설 세 편의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비정상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반이성주의 철학에 맥이 닿아 있다.

골치 아픈 걸 피하고 싶다면 번역자 주까지 포함해 22쪽에 이르는 저자 서문을 건너 뛸 것을 권한다. 소설들은 마치 ‘나쁜 남자’가 등장하는 ‘막장 드라마’ 같다. 드라마로 익숙해진 ‘막가는’ 이야기가 식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빠르게 읽힌다.

첫 번째 작품 ‘더도 덜도 아닌 딱 완전한 남자’는 벼락부자 알레한드로와, 레나다 마을의 ‘공식 미녀’인 훌리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알레한드로는 나쁜 남자라는 표현이 부족한 망나니 같은 인물이다. 마지막엔 훌리아에게 격정적인 사랑 고백을 하지만, 그 전까지는 절대 ‘사랑’을 입에 담지 않는다. 아내의 샛서방을 떼어내기 위해 아내를 정신병원에 감금하는데 정작 본인은 하녀와 바람을 피우고는 “당신의 청순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둘러댄다. 훌리아는 알레한드로가 청혼하자 거칠고 신비한 매력에 끌려 이를 승낙한다. 하지만 평생 남편의 사랑이 진정한 것인지 의심하다 죽음을 맞는다.

소설들은 단순한 통속극인 걸까. 우나무노는 서문에서 모든 인간은 7가지 미덕과 7가지 악덕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인간의 궁극적인 내면은 결코 알 수 없다고 한다. 소설은 고뇌하고 투쟁하는 인간의 내면을 묘사해야 ‘모범적’이다. 이런 우나무노의 소설관, 인간관에 기대 읽으면 신간은 통속극을 넘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실감나게 그린 심리소설이 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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