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못 말리는 '장롱 예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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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시장경제가 러시아에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많은 러시아 주민은 여전히 '장롱 예금'이라는 버릇을 못 버리고 있다. 금융기관이 워낙 불안정해 은행에 돈을 맡기면 언제 날리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여윳돈이 생기면 집안에 숨겨두는 것이다.

국제금융기관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가 러시아인의 예금 행태를 파악하기 위해 최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전체 가구의 92%가 은행이 아닌 집안에 돈을 보관하고 있다.

수도 모스크바(50%)와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3%)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노인들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30~40대의 상당수도 은행을 불신한다.

현재 러시아 주민들이 이렇게 숨겨둔 돈의 규모는 400억~600억달러(약 48조~72조원)에 이를 것이란 게 금융계의 추산이다.

돈을 숨기는 방법도 기상천외다. 책갈피, 베개, 침대 매트리스, 소파 속에 숨기는 건 고전이다.

화장지 두루마리를 끝까지 풀어 펼친 뒤 달러를 가지런히 넣어 되감는 방법이 있다. 표준길이 54m 화장지 안에 2만7000달러까지 들어간다고 한다. 빵 반죽용의 속이 빈 플라스틱 밀대에 지폐를 돌돌 말아 넣기도 한다.

비밀 봉지에 돈을 넣고 단단히 밀봉한 뒤 절인 오이나 잼이 담긴 1~3ℓ들이 유리병 안에 넣어두기도 한다. 대형 화초를 심은 화분에 파묻어 두는 경우도 있다.

온갖 은밀한 방법이 동원되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숨긴 곳을 잊어버려 낭패를 보는 경우도 제법 된다고 한다. 일반인만 은행을 기피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들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수출대금의 상당부분을 국내가 아닌 외국의 은행에 예치하는 게 상식처럼 돼 있다.

러시아의 시장경제가 성숙하려면 부실 은행을 퇴출시키고 건전한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래서 지난달 러시아 중앙은행이 돈세탁 혐의로 '소드비즈네스' 은행의 면허권을 취소한 조치를 두고 정부의 부실 은행 정리를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기대 섞인 해석도 있다.

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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