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열려라공부] 영어 발표회 열고 국제교환학생 가고 “시골학교 맞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동강중과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동강중 피아노 교육센터에서 열린 겨울 방학 음악캠프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정치호 기자]


스토리북 외우기 게임… 영어 발표회는 동네잔치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곳에 적동분교가 자리 잡고 있다. 잣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길을 지나 학교로 들어서니 문용일(46) 교사가 반갑게 맞는다. 전교생이 19명인 이 학교에 문 교사가 부임한 것은 2005년. 진달래반(2·3학년) 아이들을 맡아 지도해왔다.

문 교사는 오후 1시쯤이면 수업이 모두 끝나는 아이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학부모들이 농·축산업에 종사하거나 맞벌이를 하느라 바쁜 데다, 인근에 학원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영어 교육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학부모들이 많았다.

“학원에 안 가도 실력이 뒤처지지 않게 해주고 싶었어요.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방과후 수업을 시작했죠. 수준별 스토리북 교재를 구해다 편집·복사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줬어요. 집에서 안 쓰는 테이프를 재활용해 듣기 자료를 녹음해 주었고요.”

문 교사는 1~3학년 아이들 12명을 데리고 알파벳 공부부터 시작했다. 하루 2~3시간씩 매일 꾸준히 수업을 진행했다. 짧은 이야기책을 통째로 외우도록 한 뒤 암기 시합도 했다. 그런 뒤에는 컴퓨터 ‘영타 치기’로 외운 내용을 확인했다. 8년이나 된 낡은 컴퓨터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문 교사는 “게임 방식으로 아이들의 경쟁 심리를 자극해 영어 공부를 유도했다”고 귀띔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학 중인데도 학교를 찾은 아이들은 단어 찾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이 심판이 되어 교실 컴퓨터로 포털사이트 영어사전 기능을 활용, 단어의 소리만 들려줬다. 나머지 아이들은 각자의 종이사전으로 들은 단어를 찾아내려 열심이었다. 단어 찾기 역시 시합을 벌여 잘하는 아이들에겐 스티커를 주고 그 개수에 따라 학용품·과자 등 선물을 준다. 학습 내용이 어느 정도 쌓이면 학교에서 1박 2일 야영을 하며 영어발표회도 한다. 아이들뿐 아니라 마을 어른들도 모두 모이는 동네잔치다.

이같은 노력으로 지난해 11월 전교생이 함께 치른 JET(Junior English Test) 시험에서는 15명이 초·중·고급에 합격했다. 차로 5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의정부에서 시험을 치른 이날, 학부모들의 응원이 수능 시험을 방불케 했단다. 이용민(3년)·혜민(1년) 남매의 어머니 박은아(33·경기도 연천군)씨는 “사교육비 안 들고 시간 낭비 안 하게 돼서 좋다”며 “엄마들은 선생님께서 전근을 안 가시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문 교사는 “분교라서 다른 학년 아이들도 함께 지도할 수 있고 아이들에게 전념할 시간이 많아 좋다”며 “나도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같이 배운다는 생각으로 당분간 이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제교환학생제도 통해 농어촌 교육 탈바꿈 ‘농어촌의 국제 학교’, 동강중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충남 서천 끝자락, 전교생 55명의 이 벽지 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폐교 위기에 몰렸다가 지금은 도시 못지않은 국제화 학교로 자리 잡았다. 찾는 이도 별로 없는 시골이지만 이곳 학생들에겐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하는 수업이 낯설지 않다.

동강중은 2001년 미국국제공보프로그램(USIA)의 하나인 국제교환학생제도를 도입하면서 탈바꿈을 시작했다. 재학생들에게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상대국의 원어민 학생들을 유치하면서 농어촌 교육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미국·프랑스·벨기에·에콰도르·멕시코·인도·태국 등과 교류하면서 지난해까지 33명이 유학을 다녀왔고, 외국인 학생 21명이 이곳을 찾았다.

지난해 미국 오클라호마주 사우스이스트 고교로 유학을 다녀온 김민지(15)양은 “농어촌 학생들에게 늘 따라 다니는 학습의욕 저하와 체념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었던 게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유학비는 동강중 청암장학회가 1인당 500여만원씩을 지원하고 있다. 농어촌의 어려운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여기에 동문·독지가·주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학생들은 방과 후 교사들의 도움으로 교환학생 외국어능력시험(SLEP)을 준비한다. 학원 하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한 영어 배우기인 셈이다. 김가빈 교사는 “지난해부터 특목고·교대 합격생이 나오는 등 학업 수준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며 “홈스테이와 문화교류가 아이들의 안목도 높여줬다”고 설명했다.

예술교육 불모지란 점도 농어촌 교육이 부딪히는 큰 문제점이다. 이를 위해 동강중은 2년 전부터 피아니스트 임동창씨를 초빙해 피아노와 국악 교실을 선보이고 있다. 서천군의 지원을 받아 피아노 10여 대를 구입, 유휴교실을 피아노 교육센터로 바꿨다. 올 겨울 방학엔 음악 전공 대학생들을 강사로 활용해 지역 초등생을 위한 음악 캠프도 열었다. 이종림 교장은 “기숙사가 없어 학생들을 계속 유치하기엔 한계가 있지만 특성화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승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천·연천=박정식·최은혜 기자, 사진=정치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