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이름 없이’ 산 어머니 … 당신 있어 가족이 있었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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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님
정구복 지음, 지식산업사, 408쪽, 2만원

 #1925년. 집안 어른은 중매쟁이 말만 믿고 혼사를 정했다. 얼굴도 모르는 나이 어린 신랑. 어머니는 17세였다. 시골에서 계집아이는 소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글도 몰랐다.

#1939년. 시댁의 재산은 알량했다. 홀로 현해탄을 건너 고물상 일로 겨우 재산을 모은 아버지는 가족을 불렀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 신원 조사를 하는 일본 관원은 어머니의 이름을 물었다. 몰랐다. 일본말은 고사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몰랐다. 관원은 “바가야로!(바보냐?)”라고 고함을 쳤다. 여인의 이름은 호적에 오르지 않는 게 다반사였고, 기록됐다 한들 서류 위에서나 존재하는 이름을 그녀들이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냥 ‘여우내댁’이나 ‘갓점댁’, 그리고 ‘아무개 엄마’였을 뿐이다.

정구복(66)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어머니의 삶을 그린 책을 펴냈다. 정 교수의 어머니 서옥순(1909~2000) 여사는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바로 전 해에 태어나 굴곡의 20세기를 꼬박 살았다. 이름 없이, 아니 이름도 모른 채 격동의 시대를 살아 간 망국의 백성이었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숨은 목격자였다.

지난 40년간 역사학의 역사, ‘사학사’라는 분야를 개척한 원로 학자가 쓴 이 책은 어머니를 떠나 보낸 아들의 개인적 ‘사모곡(思母曲)’에 머물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충청도의 농촌에서 태어나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42세에 남편을 잃고, 가진 것 배운 것 없이 7남매를 키워 낸 어머니. 그의 개인사 속에 한국의 현대사가 오롯이 배여 있다.

정 교수는 어머니의 일생을 ‘역사의 변화에 떠밀려가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역사의 주체는 평범한 모든 사람”이라고 믿는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도, 친일도 한 바 없지만 한 가족을 이끌어 온 가정의 중심이었다. “일제 강점기 아래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저력은 오직 가족에 있었다”는 것이 어머니의 삶을 통해 확인한 역사학자로서의 진단이다. 역사는 이런 숱한 무명의 주인공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 교수는 “역사는 시간을 축으로 줄넘기를 하는 학문”이라고 요약한다. 과거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현재가 교차되고 미래를 투영한다. 그리고 이 무수한 줄넘기의 실타래 속엔 어머니의, 아버지의, 우리 가족의 삶이 숨어 있다.

책은 소박하게 꾸몄다. 군데군데 결혼식·회갑연 등 저자의 가족 사진이 등장한다. 일반 독자는 이게 뭔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 부모님의 사진첩 속에도 한국의 현대사가 흐르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통한다. 이념이 역사가 돼버린 그런 싸움 말고, 국민의 평범한 삶이 역사가 된, 그런 살아 있는 역사책이 집집마다 놓여있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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