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일본판 韓流의 정체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한국의 TV 드라마 겨울소나타의 배용준은 일본 여성들 사이에 욘 사마(樣)로 불리며 일본 총리보다도 인기가 높아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최근 '아시아의 미래'국제회의(일본경제신문 주최) 만찬 연설에서 이런 조크로 참석자들을 웃겼다. 그는 무엇보다 여행을 많이 다녀야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골프와 온천을 즐기는 한국 관광객이 더 늘어나길 기대한다고도 했다. 물론 싱가포르나 베트남과의 문화교류 이야기도 곁들였다.

*** 개봉 박두 한국영화 38편

일본 총리의 이런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도쿄(東京) 긴자의 서점들은 배용준 사진첩을 길거리에다 특판코너까지 차려놓고 팔지 않나, '실미도'의 일본 상륙을 필두로 한국 영화들이 일으킬 돌풍도 심상찮은 분위기였다. '개봉 박두'한국 영화가 38개나 된다는 TV광고도 수시로 꽝꽝 때려댔다.

주목을 끄는 게 또 있었다. 공항과 관광지엔 전에 없던 한국어판 지도나 안내서가 빼곡히 비치돼 있는가 하면, 올 들어 개통된 규슈(九州) 신칸센(후쿠오카~가고시마)열차 내 안내방송에 한국어 방송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서는 곳곳에 한국어 간판이 급속도로 늘고 있단다. 도쿄역 지하도 안내판에도 '마루노우치 남쪽 방면'하는 식으로 일본어.영어와 함께 한국어가 추가돼 있었다. 묵고 있던 데이코쿠호텔의 모닝콜 자동녹음장치에선 "아침 6시에 깨워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라는 한국말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투숙객이 한국인인 경우 한국어 안내방송이 나가도록 깜찍을 떨어 놓은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김포~하네다(羽田)에 새 항로가 열리는 과정도 한국 정부는 소극적이었는 데 반해 오히려 일본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사된 것이었다. 전에 없던 일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일본판 한류(韓流) 현상이 본격화하는 조짐이라고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한류는 보기에 따라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고이즈미 총리가 겨울소나타를 찬미한 것도 결국 "일본이 한국을 이처럼 사랑하니 한국도 일본을 미워하지 말고 일본에 자주 와서 관광수입을 많이 올려 달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니겠나. 또한 지방자치단체나 업주들도 결국 돈벌이에 보탬이 되니까 한국어 안내방송을 하는 것이고, 한국어 간판을 달게 됐으리라. 한국 영화나 드라마도 일본인들이 재미있어 하니까 일본 시장이 요동을 치는 것이지, 거기에다 특별히 '한국'이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난센스이기 십상이다.

총리까지 나서는 한국인 골프관광객 유치작전만 해도 한국의 10배가 넘는 2400개 일본 골프장 불황의 타개책으로 한국인들이 최고 고객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니 웬만한 골프장 식당 메뉴는 한글판이 따로 마련돼 있고, 골프비용도 한국보다 더 싸고, 회원권까지 한국인을 상대로 바겐세일하고 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 부자나라 일본이 한국인의 호주머니를 겨냥해 이처럼 애를 쓰는데, 한국은 일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슨 노력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 서울시내 도로표지판이나 안내간판에 일본어가 얼마나 쓰여 있고, 일본 투숙객들을 위한 일본어 모닝콜 서비스를 하는 호텔은 얼마나 될까. 또 기막히게 재미있는 일본 영화의 개봉 박두라는 광고가 연일 안방 TV에서 되풀이된다면 한국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 부산에 일본어 간판 확 늘려야

일본이 한류 열풍을 선전하면서까지 한국인을 불러대고 있으니, 우리는 한국땅에서 없는 일류(日流) 선풍을 일부러라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인지. 아쉬운 쪽이 우물을 파는 법인데, 오히려 여유로운 나라 사람들이 먼저 우물을 파는 형국이 전개되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일자리가 아쉬운 판에 일본을 상대로 한 돈벌이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열심인지 모르겠다. 부산 같은 곳은 시 전체가 죽기살기로 엔화 벌이에 나서야 한다. 해운대 정도에나 일본어 간판이 드문드문 눈에 띄어서는 턱도 없다.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들이 지도 한 장으로 부산시내를 누빌 수 있도록 일본어 간판부터 확 늘려야 한다. 도대체 부산이 어디인가. 부자나라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아닌가. 규슈가 기차 안에서 한국어 방송까지 하는 판에 부산은 과연 무얼 하고 있나.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