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미국의 ‘우수 언론 프로젝트’와 한국 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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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터넷 매체는 신문 산업에 엄청난 충격을 가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뉴스도, 광고정보도 신문보다 포털에 의존한다. 그 결과 독자에게 뉴스를 주면서 구독료를 받고, 소비자에게 상품정보를 알리면서 광고주로부터 광고비를 받아 수익을 창출하는 신문사로서는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어려운 상황이 쉽사리 반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문은 어떻게 대응해야 생존할 수 있을까. 절박한 이런 물음의 해답을 얻기 위해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들이 1997년 하버드대학에 모여 CCJ(The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라는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화여대 이재경 교수는 이 기구 이름을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위원회’라고 번역했다. 언론개혁이니 뭐니 하는 거대 개념이 아니라 소박하고 친숙한 용어를 써서 마음을 끈 바 있다.

이 위원회는 수많은 토론을 거듭했다. 그런데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의외로 평이(平易)했다. 저널리즘이 교과서로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뾰쪽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기본에 충실한 저널리즘만이 신문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2004년부터 메릴랜드대학 저널리즘스쿨과 손을 잡고 PEJ(The 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라는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다. ‘우수 언론 프로젝트’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PEJ는 좋은 저널리즘을 가리기 위한 한 방안으로 보도지수(The Reporting Index)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핵심 요소는 세 가지다. 첫째, 한 기사에 넷 또는 그 이상의 투명한 취재원을 활용해야 한다. 네 명 이상의 취재원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아울러 취재원이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관점의 다원성이다. 한 기사에 다양한 관점을 소개해야 하며 하나의 관점이 전체 기사의 3분의 2를 넘지 않도록 해야 좋은 기사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넷 또는 그 이상의 이해당사자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안에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을 되도록 다 만나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PEJ는 매년 미국 신문이 이 세 요소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지 조사한다.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의 일류 신문이 네 개 이상의 투명한 취재원을 활용한 기사 비율은 3분의 2에 이른다. 다양한 관점을 소화한 기사는 8할 이상이고, 넷 이상의 이해당사자를 포함시킨 기사 비율은 7할 이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신문의 현황은 어떠할까. 대체로 미국 일류 신문의 절반 수준에 머물 따름이다.

우리 언론은 평소에는 썩 잘하다가도 자사(自社)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가 나오면 표변한다. 최근의 신문·방송 겸영 문제 보도가 좋은 예다. 신문과 방송을 겸영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인터넷 기술이 사실상 영역 장벽을 허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유수한 신문사가 방송매체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겸영에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러나 언론사가 이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는 이해관계에 따라 판이하다. 방송사에서는 겸영을 허용하면 재벌과 보수언론이 공론 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점만 강조한다. 방송 겸영에 뜻이 있는 신문사는 겸영이 경제를 살리고 여론 다양성에도 이바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도 내용을 보면 넷 이상의 투명한 취재원을 활용하고,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며, 여러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하라는 미국 우수 언론 프로젝트와는 거리가 멀다. 언론사는 아전인수(我田引水)하고 학자들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한다. 답은 따로 있는데 일부러 외곽을 겉돈다. 우리 언론에 묻고 싶다. 우수 언론 프로젝트가 미국 저널리즘을 구할 것이라는 명제는 미국에만 해당할까.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학부

◆약력 :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고려대 박사, 고려대 교수회의장, 전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전 한국언론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