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용의 눈물' 龍의 함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난 일요일 방영된 TV사극'용의 눈물'을 보면서 역사의 대중화라는 긍정적 측면과 그것이 주는 또다른 해독성을 나는 동시에 느꼈다.역사란 결국 수많은 인물들이 살아간 삶의 흔적이다.그래서 인물연구가 역사연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한 왕조의 터전을 마련했던 개혁정치가를 집중 조명해 개혁 정치인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용의 눈물'은 역사의 대중화 작업에 큰 기여를 했다.그러나 기여만큼 폐해도 크다.'용의 눈물'은 강한 왕권의 대표자로서 이방원(李芳遠)과 신권(臣權)의 우두머리로서 정도전(鄭道傳)을 대결시켜 숱한 음모와 권모술수 끝에 왕권이 승리하는 장면을 부각시켰다.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생각했고 한보사태 속의 대통령과 아들을 연상하며 대선주자들의 권모술수와 용들의 전쟁에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심지어 자신이 속한 직장의 권력구조와 그 틈새에서 출세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처세의 미학을 연상하면서 드라마에 빠져든다는 것이다.그래서 남성 시청자가 47%에 이르는 최고 인기 드라마임을 자랑하고 있다.과연 이래도 좋은가. 요즘 역사의 대중화 바람을 타고 등장한 조선역사의 접근 방식에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정조의 죽음을 소설화한 이인화의'영원한 제국'은 정조의 죽음을 왕권과 신권간 대립.갈등 속에서 발생한 독살이라고 결론짓는다.

물론 픽션인 만큼 학문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용의 눈물'도 같은 구도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그것이 맞는 시각인가. 사회학자면서 역사학자였던 고(故) 이상백(李相佰)선생은 '정도전론'이라는 값진 논문을 이미 47년에 발표했다.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이는 명분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음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정도전이 세자를 끼고 돌며 왕자들을 죽이려 한다는 박포(朴苞).이무(李茂)의 밀고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 했다.기병 10기,보졸 9명,노복 몇명이라는 빈약한 군사로 이방원이 삼군을 장악한 정도전과 맞대결할 수 없었다고 본다.그런데도 드라마에선 수백의 군대가 남은(南誾)의 첩집에서 술을 마시는 정도전을 급습해 주살하는 장면이 나온다.조정 내에서도 이방원의 인기는 없었다.음모 정치가 이방원은 고려 구신(舊臣)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우면서 수십 사병을 모아 정도전을 죽이고는 그의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정도전 음모설을 유포했다고 보고 있다.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아니라 개국 터전을 닦은 개혁 정치인을 탐욕적인 왕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죽이고 자신의 아버지 위업을 가로챈 혐의를 치밀한 자료분석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어찌보면 12.12사태를 연상시키는 쿠데타다.뭇 정치인들이 본받을 귀감이 결코 될 수 없는 그릇된 정치사건이라고 본다.그런데도 언론은 덩달아'왜소한 한국 정치판을 통타하는 카타르시스'라고 부채질하고 이 후보는 정도전형인가,저 경선자는 이방원형인가를 저울질하는 작태를 보이고 있다.잘못된 일본식 역사 영웅만들기의 재판(再版)처럼 보인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역사를 내세운 우리의 사극(史劇)은 알게 모르게 대중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여인네들의 암투로 시종일관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조선의 역사는 안방 여인네들의 통치사로 알게끔 두루 뇌리에 심어주었다.여기에 이젠 남성들마저 용이라는 시대착오적 대권에 사로잡혀 권모술수만이 정치의 핵심인양 빠져들고 있다.그래서는 대통령 선거는 내가 뽑는게 아니고 권력자 간의 야합과 결탁,그리고 권모술수가 만들어내는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까 걱정스럽다.

정치를 권모술수의 총화라고 보는 의식이 넓고 깊게 확산된다면 우리 정치문화는 조금도 달라질 수 없다.이방원이 집권하자 정도전은 역적이고 태종은 성군이 된다.절차의 잘못은 사라지고 오로지 승자의 영광만이 남는다.내가 대통령을 뽑는게 아니고 김심(金心)이 누구 손을 들고 민주계가 어디로 붙느냐에 따라 권력게임은 끝난다고 보게 된다.우리 의식은 아직도 왕조정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말로는 민주정치를 되뇌며 오늘 저녁도 '용의 함정'에 빠져드는게 우리의 정치수준이 아닌가를 생각해 본다. 권영빈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