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렴정치회고록>17.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일본 국교 정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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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국은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지 20년만인 65년 12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증오와 갈등을 털고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이 일을 밀어붙인 지도자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동안 이 사건은 비판자와 반대자들이 朴대통령을 몰아붙인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그때 반대자들은'굴욕외교''매국외교'라는 함성을 외쳤는데 그 소리는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대표적인 목소리가 소위 6.3세대라 불리는 사람들일 것이다.6.3세대는 64년 6월3일 朴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사건과 연결된 말로,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다.

30여년동안 나는 그들에 대해'역사의 진실에 대해 공부를 게을리한 사람들'이란 인식을 가져왔다.그들은 애국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역사에 대해 성실하진 않았다.그들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朴대통령은 밀어붙였고 거기에는 그래야 했던 역사적 당위가 있었다.

6.3세대가 몰랐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근거가 약했음에도 朴대통령이 회담에서 훌륭한 성과를 얻어냈다는 것이다.제2차 세계대전후인 51년 연합국이 일본과 체결한 대일평화조약에 따르면 일본은 참전국에 입힌 피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었다.연합국중 중국과 인도는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버마(현 미얀마).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은 배상을 얻어냈다.

그런데 한국은 안타깝게도 참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었다.대개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는'독립축하금'이란 명목으로 배상적 성격의 자금을 받는 것이 세계의 관례였다.

그런 맥락에서 물론 우리도 당연히'독립축하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그런데 다른 사정 하나가 있었다.

한일회담에 참여했던 배의환(裵義煥)전 주일대사는 회고록에서“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는 나에게'일본은 패전하면서 한국땅에 30억~40억달러나 되는 재산을 놓고 나왔다고 주장한다'고 얘기해주었다”고 적고 있다.일본은 그만한 재산을 한국에 주었으니 따로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그만큼 국제법적으로,그리고 논리적으로 우리는 대일청구권 교섭에서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정말로 나라를 위했다면 의식있는 의원.언론인.교수.학생지도자들이 이런 배경을 공부하고 국민에게 설명했어야 했다.그런데 야당이란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64년 3월24일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일어나자 이틀후'삼민회'소속 김준연(金俊淵)의원은 국회에서“김종필(金鍾泌)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이 합의한 6억달러의 청구권중에서 1억3천만달러가 국민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도입돼 있다”고 발설해 데모에 더욱 불을 질렀다.

金의원은“대한민국에서 가장 정통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했으면서도 검찰에 출두해서는“장택상(張澤相.무소속)의원에게서 들었다”고 했다.증인으로 불려간 張의원은“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을 뺐다.

金의원은 있지도 않은 일을 무책임하게 얘기해 데모를 더욱 극렬하게 만들었고,그로 인해 朴대통령은 64년 6월3일 계엄령을 발동해야만 했다.朴대통령은 후일 두고두고 金의원의 발언을 개탄했다.“정치인이라면,그것도 다선이라면 국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정략적인 계산에서 터무니없는 얘기로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탄식하곤 했다.

65년 5월18일 미국을 방문한 朴대통령은 기자클럽에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 이렇게 연설했다.“이 긴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다.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는 것이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 무상 3억달러,일본정부차관 2억달러,민간상업차관 1억달러(후에 3억달러로 늘어남)의 대일청구권.朴대통령이 정권의 생명을 걸고 고독한 싸움끝에 얻어낸 이 귀중한 자금은 우리 경제개발에 투입돼 고도성장의 비료가 되었다.만약 朴대통령이 국민의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해 대일교섭을 다음 정권으로 미루었다면 우리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청구권자금이 실로 요긴하게 쓰인 곳이 포항제철이다.우선 연산 60만t규모의 종합제철소를 짓기 위해 한국은 67년 3월 대한(對韓)국제차관단을 결성했으나 세계는 우리에게 냉소적이었다.

69년 4월엔 세계은행이,그해 5월엔 미국수출입은행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포항제철에 대한 차관제공을 거부했다.한국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철(鐵)이 필요했는데 돈이 없어 포철을 착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 대일청구권 자금이다.포철에 들어가야 할 외화는 1억6천8백여만달러였는데 朴대통령은 이를 모두 청구권자금으로 충당했다.항일독립유공자들과 어민등 각계에서 청구권자금을 요구했지만 그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정리=김진 기자

◇이 회고록은 20회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회고록은 제1회부터 중앙일보 인터넷신문(주소:www.joongang.co.kr)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지금까지 실린 회고록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환영합니다.팩스 02-751-5372.

<사진설명>

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일본측 수석대표 스기의 예방을 받고 있다.야당과 대학생들은 이를'굴욕외교'로 규정하며 격렬히 반대.비판했다.한.일 국교정상화의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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