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유창혁, 반집에 울고 반집에 웃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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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창혁의 내부에서 격돌하는 슬픔과 투혼이 잇따른 반집승부로 나타나고 있다.

아내를 떠나보낸 상처를 딛고 다시금 바둑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유창혁9단의 여정이 험난하다. 지난주 그는 중국리그와 한국리그에서 두번 연속 뼈아픈 역전 반집패를 당해 아직도 집중력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직후 또 다른 중요 대국에서 기어이 반집승을 거두며 재기의 불씨 살리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유9단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일주일 동안 둔 세판의 바둑을 모두 반집승부로 끝냈다. 시련과 투혼의 눈물겨운 대결이 빗어낸 진기록이었다.

유창혁9단은 중국리그에선 산둥(山東)팀 소속이고 한국리그에선 범양건영팀 주장이다. 석달 전 아내 김태희씨를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겨 연전연패했던 유9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5월 초의 LG배에선 8강에 오르며 갈채를 받기도 했다.

5월 27일 중국으로 간 유9단은 충칭(重慶)팀의 기둥이자 중국랭킹 1위인 구리(古力)7단과 마주앉았다. 1국에 1만달러 정도로 중국 일류선수보다 몇배나 비싼 대국료를 받으면서 근래 통 몸값을 못한 유9단은 어떻게든 이 바둑을 이겨 체면을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유리하게 전개됐던 바둑은 막판에 귀신에 홀린 듯 반집패로 이어졌다.

사흘 뒤인 5월 30일, 유9단은 이번엔 한국리그 범양건영의 주장으로 보해 팀의 주장 송태곤7단과 대결했다. 전날 팀의 2장 윤준상2단은 보해의 2장 원성진5단에게 시종 밀렸으나 막판 반집 역전승을 거둬 전적에서 2대1로 앞선 상태였다. 져도 빅인 상황이라 부담감도 적었고 바둑도 잘 풀렸다.

송태곤의 열화와 같은 공격 속에서도 세개의 곤마를 모두 해결하며 완승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이 무슨 괴변인가. 끝내기 무렵부터 거듭 실수를 범하더니 10집도 더 이길 수 있는 바둑을 마(魔)라도 낀 듯 딱 반집을 지고 말았다. 유9단은 일절 변명을 하지 않았으나 우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유9단은 국수전 예선결승전에서 최명훈9단과 대결해 292수까지 가는 혈전 끝에 반집승을 낚아올렸다. 신기하게도 한주 동안 둔 세판의 바둑이 모두 반집승부였는데 이것도 처음보는 진기록이었다. 유9단은 이 반집승을 기점으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서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는 요즘 두살된 큰아들과 생후 한달된 둘째 아들을 모두 부모님 집에 맡겨둔 채 승부에 전념하고 있지만 모든 게 임시 상황이고 정상적인 생활은 아니다. 텅빈 집에서 밤에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잠을 이루는 등 마음이 흔들릴 때도 많다.

최근의 잇따른 반집승부는 바로 이 같은 정신적 시련과 유9단의 승부에 대한 집념이 격돌하면서 빚어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유9단은 6일의 후지쓰배 세계대회에서 최철한8단과 대결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박치문 전문기자

*** 이세돌 '중국룰'에 반집패

이세돌9단도 중국리그에서 매우 비싼 몸에 속한다. 8국을 두고 약 8000만원의 대국료를 받고 경비 일체를 중국 측이 지불한다. 지난 5월27일 구이저우(貴州)팀의 이세돌은 중국리그 데뷔전에 나섰다. 상대는 베이징(北京)의 류싱(劉星)6단. 구이저우와 베이징은 리그 선두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는 참이라 이래저래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9단은 그러나 중국이 7집반의 큰 덤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통역도 바둑을 잘 몰라 덤이 6집반이냐는 이9단의 질문을 흘려넘겼다.

바둑은 미세했건만 계산을 잘 하는 이9단은 반집승을 확신하고 여유있게 두었고 종국 후에도 승리했다고 믿었다. 계산이 너무 정확해 당한 기묘한 반집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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