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정리 주민 "70년대 석면 항의하면 경찰에 잡혀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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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면의 공포는 이미 마을을 휩쓸고 있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덕정마을,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석면광산과 공장이 있었다. 지난 5일 보도된 석면 피해 마을 중 하나인 이곳은 이미 취재진의 방문에 익숙해 보였다.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폐광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한 뒷산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이곳은 잘 가지 않아. 그래서 길이 험해. 아픈 기억만 있는 이곳을 가려고 하는 이는 없지” 겨울바람만큼이나 쓸쓸한 첫마디로 김재운 할아버지(73)는 기억을 더듬어 갔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석면광산에서 일을 했어요. 군 징용을 피해 광산에서 일하던 외지 사람들도 있었죠. 사고로 사람들도 많이 죽었어요.” “박정희 정권 때도 이곳 광산은 계속 운영했어요. 경제 개발이다 새마을 운동이다 해서 석면이 많이 필요했지. 집 지붕도 석면으로 만든 슬레이트를 가장 많이 사용했으니까.”

폐광을 찾아가는 길은 험준했다. 과거 이곳이 광산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바닥은 온통 돌로 가득해 신발 밑창에서부터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석면광산의 지난 아픔을 하나하나 되새기는 듯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인이 돼도 일하는 사람들이야 똑같이 고생이지. 그 당시에는 마을이 온통 석면가루로 뿌옇게 보였지만 누구하나 이게 해로운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 폐가 아파서 피를 토해도 그냥 근처 술집에서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고 잊어버렸지.” 무엇이 마을 주민들을 침묵하게 했을까? 과거 1970년도에는 노동운동이 한창이었고 각계의 노동조합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더욱이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 광산마을에서 무엇이 이들의 저항을 막은 것일까? “보상은 무슨…그때 홍성경찰서장이 ㅇㅇㅇ였는데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무조건 잡아갔어. 잡혀간 사람들은 큰 곤역을 치렀지. 게다가 현장 감독들이 매일 감시를 해서…무서워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

폐광에 도착하자 경고문과 철책 펜스가 취재진을 맞았다. 철책 너머에는 깊이 파인 광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철책을 따라 형성된 갈대밭이 황량한 폐광을 가려주고 있었다. 끝자락 낭떠러지에는 덕정마을에서 30년간 이장을 지낸 이경석(81) 할아버지가 석면을 줍고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석면이 이렇게 굴러다니고 있어. 아직도 이 마을에는 폐광에서 부는 바람을 따라 석면가루가 날리고 있겠지. 난 그렇게 생각해” 이경석 할아버지는 조부와 아버지를 모두 석면광산에서 잃었다. 사인은 역시 폐질환이었다. “두 분 다 진찰 한번 제대로 못 받고 돌아가셨어. 보상은 꿈도 꿀 수 없었지. 그래도 이제라도 알려졌으니까. 검사는 받을 수 있겠지." 산 한가운데가 깊숙이 파인 폐광에는 지금도 군데군데 발파 작업을 한 굴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지하수로 가득찬 굴 안에는 절망과 한숨이 피어났다.

홍성 외에도 충남 곳곳에는 석면광산이 있다. 보령시 청소면 정전2리, 이곳 역시 석면으로 인한 피해지역이다. 이곳 주민 신인철(58) 씨는 이번 피해조사에서 폐결절 진단을 받았다. 빠듯한 농가살림에 그는 건강보다 치료비 걱정이 앞섰다. “난감하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데.” 운송 업무를 담당하던 신 씨는 석면광산에서 30년을 근무했다. 30년간 쌓인 석면은 이미 그의 폐에서 조금씩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며칠 동안 수많은 취재진들이 왔다 가는데 엉뚱한 것만 보도하고 있어. 자꾸 보상 문제만 말하는데 우린 보상이 목적이 아니야. 이곳에 광산이 운영될 때는 외지 사람들도 많이 와서 일을 했어. 그 사람들도 분명 석면 때문에 아플거야. 그 사람들 찾아서 알려줘야지. 광산에서 일했던 사람들 모두 검사만이라도 받아봐야지. 우린 그게 가장 하고 싶어. 살 수 있는 사람은 찾아서 빨리 치료해 살려야지. 그게 사람의 도리지”

뉴스방송팀 강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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