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 작가 이균영씨 유고집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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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자유와 정의를 향한 열정,또 꼭 그만큼의 관용과 화해도 절실한 계절.세상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끌어안으려 했던 한 진보주의 사학자 작가의 유고집이 출간돼 이 불투명한 시국에 무언의 교훈을 던지고 있다.지난 연말 귀갓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45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균영(사진)의 소설'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가 최근 민음사에서 나왔다.

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씨는'바람과 도시''멀리 있는 빛''노자와 장자의 나라'등 작품집을 펴내며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또 94년에는'신간회연구'로 단재학술상을 수상하는등 진보적 사학자로도 명망을 얻었다.

이번 유고집에는 장편'빙곡(氷谷)'과 표제작'나뭇잎…''자유의 먼길'등 중편 2편이 실렸다.'나뭇잎…'는 출세에 급급한 현실주의자인 첫사랑의 여인과 헌신적인 아내 사이에서 한평생 갈등하며 살아온 노기관사의 삶을 통해 인생과 사랑의 의미를 캐묻고 있다.

'자유의 먼길'은 교수사회의 비리를 실존적 차원에서 다룬 작품.교수채용의 문제점,철저한 학맥과 인맥 위주로 움직이는 교수사회의 폐쇄적 문화,그 벽에 부닥쳐 실존적 고민이 정신병적 증상으로까지 이어지는 한 유능한 교수의 초상을 통해 대학사회를 준열하게 비판하면서 양심과 인간 본연의 자유까지 파고들어간 작품이다.

교통사고 당시 지니고 있던 봉투에서 발견된 A4용지 16장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내려간 2백자 원고지 1천2백여장 분량의'빙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갈등과 비판.고발을 넘어 대화합을 소설적으로 성취한 우리시대 보기 드문 수작.해방공간,8.15에서 6.25로 이어지는 좌.우익 그 살육의 현장에서 어느 쪽의 생명이든지 살려야 한다며 이념보다 휴머니즘을 선택했던 주인공의 한평생을 둘러보며 이념.파벌.애증등으로 갈린 세상을 깁고 있다.'빙곡'에는 여순사건등'사실(史實)'이 사학자 작가답게 충실하게 들어있다.그러나 그 사실과 사실을 잇는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과 휴머니즘이 이 작품을 진정 인간이 이뤄내야 할 세상,그 화해로 나아가게 하고 있어 작가의 너무 이른 죽음을 더욱 아깝게 만든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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