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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촛불을 보고 싶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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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촛불에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은 이 대통령이다. 쇠고기 협상을 떠넘기고 간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낸 미국 관료, 촛불을 들고 나온 학생, 시위를 격화시킨 반정부 세력에게 책임을 미뤄선 발전이 없다.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매우 근원적인 문제는 대통령의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이 타결되자 “국민들이 질 좋고 싼 쇠고기를 먹게 됐다”고 반겼다. 시장경제 논리로 따지자면 맞는 얘기다. 그러나 쇠고기는 경제나 과학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통상이나 교역이란 문제로만 보자면 개방을 서두르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그런 단순한, (선의로 생각하자면)순수한 생각에서 대통령은 타결을 서둘렀을 것이다. 그 결과는 졸속으로 드러났고 촛불을 불러들였다.

촛불은 세모의 밤을 타고 넘어 새해 재등장을 예고했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종로 보신각의 타종 행사장엔 수천의 촛불이 모였다.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동시에 익숙한 구호들이 터져나오면서 노란 풍선이 창공을 휘저었다. 인터넷에선 이날 행사를 중계한 KBS가 시위 모습을 일부러 안 보이게 편집했다는 비난으로 시끌벅적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촛불은 해를 넘긴 국회 파행의 원인(遠因)으로도 살아 있다. 쟁점 법안, 이념 법안이란 것들이 촛불과 관련돼 있다. 시위 중 복면을 쓰지 못하게 하자는 법안, 시위 피해에 대한 집단소송을 뒷받침하자는 법안, 사이버 모욕죄를 신설하자는 법안 등이 촛불의 후유증을 말해준다. 미디어법을 정치적 음모로 몰아붙이는 주장도 촛불의 힘을 빌리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촛불 피해액을 3조7000억원으로 계산했다. 과장됐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경제적 셈법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을 따지자면 이 정도가 아닐 것이다. 촛불이 초래한 공동체의 균열과 불신, 갈등과 같은 손실은 숫자로 표현되지 못한다고 해서 무시되어선 안 된다.

그래서 새해엔 진짜 거리의 촛불을 보고 싶지 않다. 불행히도 객관적으로 보자면 촛불은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걱정되는 촛불의 새 동력은 실업이다. 지난 연말 유럽인은 그리스 폭동에 경악했다. 유럽과 같은 문명세계에서 일어나리라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도심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발단은 거리를 순찰하던 경찰이 다툼 끝에 15살 소년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사건이다. 사건이 터진 아나키스트 거리는 평소에도 거리 분쟁이 많던 곳이었다. 청년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도심을 파괴했다. 시위대는 경찰 진입이 금지된 대학 캠퍼스로 몰려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화염병을 보충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서로 교신하며 조직적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들의 분노엔 실업의 불만이 깔려 있었다. 관광과 해운으로 돈을 벌어온 그리스 경제는 최근 경제위기로 급속히 가라앉았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현재 사실상 실업자는 317만 명으로 집계됐다. 확실한 실업자는 75만 명이지만 취업을 포기하고 쉬는 반(半)백수까지 합친 숫자다. 문제는 실업이 더 늘어날 것이며, 특히 젊은이의 구직난이 더 심해질 것이란 점이다. 헨리 키신저는 한 칼럼에서 ‘경제위기의 피해자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돼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 2009년의 세계적 이슈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고 한다. 대통령은 촛불에서 배워야 한다.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경제를 단순히 경제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대통령은 최고경영자(CEO)가 아니라 정치인이어야 한다. 경제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해석하고 대처하는 종합적 판단력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그렇게 혐오하는 ‘소모적인 이념논쟁’은 정치의 부정적인 단편에 불과하다. 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풀어내는 ‘가능성의 기술’이다. 정치의 생산성 역시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되어선 안 될 소중한 가치다. 정치는 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내는 종합예술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최고의 학문(Master Science)’이라 불렀다.

오병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