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서울 도착 인사말 - 全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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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나는 이번에 갈라진 조국의 북을 떠나 남으로 넘어오게 되었다.나의 청원을 허락하여 주고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돌려주고 따뜻이 맞이하여 준데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충심으로부터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나를 뜨거운 동포의 정으로 끌어안아 주고 있는 친애하는 국민여러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또한 나의 문제를 국제관례에 따라 처리해준 중국과 필리핀 정부에도 감사를 드린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은 벌써 반세기 이상이나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이같은 상황에서 나의 삶의 터전이었던 북조선은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미 희망을 잃은지 오래됐다.올바른 생각을 가진 자는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으며 오히려 견제와 감시속에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체제로 변질되었으며 경제는 전반적으로 마비상태에 들어가고 있다.인민들은 기아에 신음하고 있으며 북조선 당국은 드디어 국제사회에 구원의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하여 놓았다고 호언장담하던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되었다.

이같은 사태는 북조선 정권의 그릇된 정책이 빚어낸 후과이다.북조선은 개혁.개방을 비사회주의 길이라고 견결히 배격하고 있으며 남조선과의 대화를 거부한채 무력적 힘의 대결만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 남북한의 대립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대립이 아니라 봉건독재와 자유민주주의의 대립이며,봉건적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주의의 대립이며,전쟁과 평화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조선 당국은 남북간의 대립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남한을 계급적 원수로 간주하면서 남조선 해방의 기치밑에 무력통일 방침을 정당화하려고 모든 힘을 다하고 있다.

북조선 당국이 인민들을 굶어죽는 상태에 두고서도 개혁.개방을 기어코 거부하고 전쟁준비에 계속 몰두하고 있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다.이제 북조선은 수십년동안 전력을 다하여 키운 막강한 무력을 사용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조성된 엄중한 사태를 놓고 수십년간 신임받으며 지내온 북조선 당국의 고위 간부로서,내외에 많은 벗을 가지고 있는 학자로서,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우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생각은 끝없이 복잡하고 고민은 비길데 없이 심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다 합쳐도 7천만 우리민족의 생사운명과 바꿀 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출로는 오직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보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어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다.

이 기회에 나는 북조선 당국이 남조선 혁명노선을 버리고 헐벗고 굶주리는 주민들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줄 것을 진심으로 호소하는 바이다.

나는 이미 민족앞에 큰 죄를 지었으며 부끄럽기 그지없다.이 죄는 그 무엇으로서도 보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조금이라도 죄를 씻고 죽을 수 있겠는지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나 남쪽 동포들이 허락만 해준다면 힘을 합쳐 전쟁도발을 막고 우리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마지막 힘을 다 바침으로써 조금이나마 민족앞에 속죄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처음으로 유서깊은 역사의 도시,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보는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하며 그동안 민족의 영예를 떨치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온 남쪽 형제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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