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문화유산기금법 통과 시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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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행복은 물질에만 종속되어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문화를 이야기하고, 문화라는 말이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논의된다. 문화정책, 문화 대통령, 문화국민, 문화산업, 문화시대, 문화학 같은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문화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창조적 상상력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이러한 문화영역에 속하는 것 중 하나가 문화유산의 보전과 발전이다. 문화유산은 전 인류의 것인 동시에 그 나라 국민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세계적 수준과 국가적 수준에서 보전과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문화유산의 보전과 활용은 국민이 향유할 권리이면서 국가가 수행해야 할 1차적 의무다. 따라서 당연히 헌법상 국가목표 규정의 내용을 이룬다.

그간 우리 정부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문화재 관리라는 수준에 머물다가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겨우 문화재청을 설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보전과 발전은 가만히 있으면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거시적인 인식구조를 확립하고, 이를 실현하는 법제를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그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충분히 확충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을 보면 아직도 문화유산의 문제를 고고학적 수준에서 접근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국가적 차원의 인식도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문화유산 발굴,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등록문화재, 매장문화재, 문화유산 수리·정비, 문화유산 방재, 종택 보존과 활용 등에 관한 법제 역시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를 실현할 인적·물적 자원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파리·빈·이스탄불에만 가보아도 추운 한겨울에도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의 여행객이 몰려와 돈을 뿌리고 간다. 각종 문화유산 덕에 그냥 앉아서 돈을 버는 셈이다. 굳이 돈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 나라의 국가 브랜드와 수준도 자연히 높아진다. 그 나라 국민은 가만히 앉아 수준 높은 문화국민이 된다.

우리도 우선은 돈에 급급해 문화유산도 문화산업 측면에서 접근하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에는 재원이 필요하다. 국민들이 문화유산을 향유하게 만드는 데에도 절대적으로 재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할 생각은 못한 채 ‘1000년 고도 경주’나 ‘반만년 역사’ 타령이나 하면서 문화가 거저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이래서는 일이 될 리가 만무하다.

경제 살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현 정부지만, 이제 수준 높은 문화 한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발상의 전환과 대대적인 국가적 실천이 필요하다. 여기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재원인데, 문화유산의 보전과 발전에 관한 재원의 규모는 사전에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기간을 정해놓고 확정된 금액만 사용하는 일반회계로 운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의 예에서 보듯이 문화유산 보전·발전을 위한 기금을 지속적으로 조성해 가는 것이 요구된다. 기금을 조성하는 데는 문화유산 보전의 의무를 1차적으로 지고 있는 국가가 기본적인 재원을 먼저 출연하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재원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재원도 없이 쥐꼬리만 한 문화재청의 예산으로 이런 일을 하라고 해왔으니 그동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누구 나무랄 것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지만, 그나마 이번 국회에 문화유산의 보전·발전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법안이 상정되었다. 의원들이 진정 국민의 대표라면 이전투구(泥田鬪狗)로 머리 터지는 정치싸움이나 하며 국민을 실망시킬 것이 아니라 이 건 하나라도 먼저 처리하기 바란다. 한심한 정치인들을 보고 있는 우리 국민이지만, 그래도 우리 국민은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