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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선암사와 신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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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시인 정호승은 오래된 절집에 들렀다가 오줌 누러 뒷간을 찾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낡은 종잇장에 쓰인 글귀 하나. ‘몸속의 묵은 짐을 내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 없이 버리세요.’ 갑자기 암모니아 냄새가 밴 해우소가 늙은 어머니의 품 안처럼 느껴졌다. 그는 소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속으로 한참을 울었다. 가슴속에 맺힌 채 남의 눈치만 보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몸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나서야 정호승은 깔끔한 시 한 편을 얻었다.

세계 최고의 보도사진 작가들의 모임인 매그넘. 무기 대신 카메라를 들고 22년간 전쟁터를 누빈 로버트 카파가 주축이 돼 결성한 모임이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 현장의 ‘어느 인민 병사의 죽음’으로 일어섰고, 흔들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들로 불멸의 이름을 얻었다. 그는 “내가 갈 곳은 따로 있다”며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잉그리드 버그먼의 청혼을 물리친 인물이다. 그의 운명은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으면서 끝났다. 카파는 많은 후배들이 따랐지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은 없다. 다만 매그넘 사무실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좋은 장비를 탐내지 말고 편한 신발을 구하라.” 더 많은 발품을 팔수록, 더 가까이 현장에 다가갈수록 좋은 사진을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다.

정말 힘들었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 가난은 사형과 무기징역 사이의 언도되지 않는 형벌이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실감나게 다가온다. 내년은 더 고단할 것이라고 한다. 마이너스 성장이라면 삶은 팍팍해지고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 게 분명하다. 며칠 안 남은 세밑에 무거운 마음부터 비우면 어떨까 싶다. 굳이 멀리 갈 것은 없다. 마음껏 목놓아 울 수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곧 선암사 해우소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는 신발끈을 졸라맸으면 한다. 카파처럼 더 많은 발품을 팔 각오를 다지면서…. 견디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틀림없이 내년에도 봄은 올 것이다. 그동안 헤쳐온 간난의 세월과 비교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세상 아닌가.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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