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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누운 노을 보며 시인이 말했다 "술 마시러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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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일몰 사진을 잡았다. 날이 맑았고, 수평선을 가리는 해무도 없었다. 수면 위로 해 그림자가 옅게 비친다. 간조 때여서 그림자가 길게 퍼지진 않았지만 여하튼 귀한 장면이다. 강화도 장화리 죽도 앞에서. [조용철 기자]

2008년도 겨우 닷새 남았습니다. 이맘때마다 여행기자는 해넘이 취재를 갑니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일종의 의례인 셈이지요. 어디를 갈까 올해도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강화도에 틀어박혀 사는 한 시인의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함민복. 서울의 높은 방값을 감당하지 못해 1996년 생면부지 강화도의 빈집을 찾아 들어온 마흔여섯 살 노총각입니다. 약삭빠른 세상 등진 채 돈 없으면 없는 대로 돈 생기면 생기는 대로 사는, 어찌 보면 대책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한 시인을, 한국 문학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사는 마지막 시인이라 부릅니다. 그와 함께 강화도에서 우리만의 해넘이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견뎌낸 2008년을, 소주잔 앞에 두고 들었습니다. 올해 그는 유독 혹독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막막한 삶에서도 희망을 말했습니다. 그러고선 예의 그 순박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지는 해 바라보려 굳이 먼 길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아파트 숲 사이로 떨어지는 해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한 번쯤, 날마다 뜨는 해 눈여겨보시길 바랍니다. 툭툭 털어낸 다음에야 일어설 수 있는 법입니다.

강화도=손민호 기자

프롤로그

-엥? 이사 갔다고? 어디로? 전등사 앞에? 왜?

질문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함민복이 강화도 동막해변에 터를 잡은 지 13년째. 낡고 늙은 집이었지만 그는 여기서 시를 썼고, 동네 어부와 함께 갯일을 다녔다. 시인 함민복을 아는 독자에게 동막해변은 자그마한 섬마을이 아니다. 함민복의 동막리는, 잿빛 일상에 찌든 도시인에게 일종의 낭만적 해방구와 같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만의 통화에서 동막해변을 떴다고 털어놓고 있었다.

-집주인이 펜션을 차린다고 해서. 그동안 잘살았지, 뭐. 동네 친구들이 딴 집을 알아봐 줬어.

-집세는?

-15만원. 저번 집보다 5만원 올랐지. 그래도 좋아. 경찰이 지켜주거든. 헤헤.

-무슨 소리야?

-파출소가 집 앞이야, 헤헤. 근데 무슨 일이야.

-동막에서 지는 해 바라보며 소주 한잔할까 싶어서.

-그거 좋지. 내려오기 전에 전화 줘.

그는 동막해변에 먼저 나와 있었다.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맞잡은 함민복의 손. 손등이 온통 터 있었다. 시인의 손이라기보단 어부의 손이었다. 전작이 과했는지, 아직 해지려면 멀었는데도 그의 눈가는 발그스레했다.

-벌써 한잔 걸치셨네.

-헤헤헤…. 일몰 보려면 죽도 쪽으로 가야 되는데. 거기 가면 사람들 무지하게 많아. 제방에 죽 줄지어 있어. 웃기지? 날마다 보는 해, 꼭 연말만 되면 보겠다고 이 난리를 치고 말이야. 사진기도 좋아 보이더라고.

-그렇지, 전 국민이 사진작가인 시대지.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흰머리가 늘었소? 장가도 못 갔는데 늙으면 어떡해.

-일이 많았어. 몰라? 사고 났었던 거?

해 넘어가다

일몰 사진을 찍으려면 미리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일몰시간. 해종일 소걸음이던 해는, 사라지기 직전 한껏 가속도를 낸다. 일몰시각보다 30분은 먼저 현장에 있어야 안심이다. 다음으로 포인트. 해는 수직 하강하지 않는다. 비스듬히 경사를 그리며 낙하한다. 한쪽에 섬이나 나무를 거는 앵글이라면 치밀한 사전 예측이 필요하다. 끝으로 물시간. 서해안 일몰은 물때가 제일 중요하다. 강화도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경우엔 썰물 때가 훨씬 낫다. 갯벌에 길게 누운 노을이 정감 어린 풍광을 자아낸다.

함민복의 안내로 강화도 제일의 일몰 명소를 찾아갔다. 마침 간조 때였고 사리였다. 장장 4㎞에 달한다는 강화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마침내 일몰. 수평선이 명쾌하게 그어졌다. 일몰사진을 망치는 주범 해무(海霧)가 고맙게도 이번엔 보이지 않았다. 수평선과 맞닿은 태양이 아래부터 녹기 시작했고, 태양을 받아 안은 수면은 붉게 물들었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일순 숙연한 공기가 감돌았다. 캔맥주를 홀짝이던 시인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해 넘어가면 바람 분다. 사진 찍었으면 얼른 술 마시러 가자. 갑자기 추워진다.

-왜?

-내가 기상학자냐? 난 시인이다.

-그런데 무슨 사고?

-촛불집회 때 경찰한테 맞아 입원했었잖아.

-거긴 왜 갔는데?

-시 쓴다는 놈이 그런 델 안 가보는 게 말이 되느냐?

-그건 그렇지. 김훈 선배부터 한국에서 문학 한다는 사람은 한두 번씩 다 나가봤다더라. 맞은 데는 괜찮고?

-추워지니까 다시 아프다. 그래도 거기서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학생 때 한창 데모하던 생각도 나고. 재미있었어.

함민복의 희망 노래

10년 전 외환위기 때 한국 문화계엔 아버지 바람이 불었다. 구조조정이란 신조어는 평생 한 직장만 알았던 우리의 아버지를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았다. 아버지의 굽은 등과 깊은 한숨은 외환위기를 상징하는 하나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2008년, 다시 경제 한파가 불어닥친 요즘. 우리 문화계는 엄마를 찾는다. 하지만 요즘의 엄마 신드롬은, 따뜻한 집안에서 가족을 보듬는 엄마가 아니라 제자리에 없는 엄마를 그리고 있어 더 시리고 아프다.

함민복도 엄마의 시인이다. 징글징글한 가난의 기억을 그는 엄마란 이름으로 종종 노래하곤 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눈물은 왜 짠가’다. 어머니와 설렁탕 집에서 있었던 일을 무연히 재현한 산문시다.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던 어머니가 막둥이 아들놈 고깃국 먹이려는 마음에 설렁탕집으로 들어간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국물이라도 되게 먹어 둬라”. 어머니는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국물이 짜다며 주인 아저씨에게 국물을 더 달라고 부탁한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 몰래 아들의 투가리에 국물을 붓고, 그만 두 투가리가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애써 시선을 외면하던 주인 아저씨 아무 말 없이 깍두기 한 접시 놓고 가고,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눈물은 왜 짠가.

-어머니는?

-오늘내일 하신다. 10월에 쓰러지셨어. 뇌경색인가 그렇다더라. 지금은 요양원 같은 데 계셔. 치료를 받는 게 아니라 그냥 가실 날만 기다리는 거지.

-형님이라도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있다고 별수 있냐. 간병인 붙였어.

-돈은?

-인터넷에 에세이 연재하기로 했잖아. 원고료가 꽤 세다. 잘됐지.

-집에서 쫓겨나도 잘된 거고, 얻어 터져도 잘된 거고, 어머니가 쓰러져도 잘된 거냐?

-헤헤헤. 그래도 이렇게 잘살고 있잖아. 일이 터질 때마다 어떻게든 수습이 되더라고.

소주 맛이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쓰지도 않았다. 맹물 모양 도무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뭐라 위로라도 해야 할 텐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함민복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의사가 많이 바쁜가 보더라고. 어머니 얼굴 잠깐 쳐다보더니 바로 나가더라고. 계단 아래까지 따라가서 내 시집이라며 줬다. 그랬더니 힐끗 내 얼굴을 쳐다보더라. 다음 날 간호사들이 나를 알아보더라고. 유명한 시인이시라면서요? 하더라. 헤헤헤. 그럼 됐지, 뭐.

에필로그

다음 날 저녁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동안 주뼛거리더니 겨우 용건을 꺼냈다.

-기사 너무 우울하게 쓰지 마. 좋은 얘기도 아니잖아.

-함민복 시인이 어제 해준 얘기 중에 절망에 관한 건 없어. 희망에 관해서만 얘기했어.

-내가 그랬어? 그럼 됐지. 헤헤헤.

여행 메모

함민복 시인이 일러준 일몰 명소는 화도면 장화리에 있다. 84번 지방도로를 타고 섬 서쪽으로 가다 장화주유소를 끼고 좌회전하면 긴 제방이 나온다. 제방 너머에 죽도가 있다. 강화 갯벌은 세계 4대 갯벌이자 천연기념물 419호다. 간조 때 드러나는 갯벌은 여의도 면적의 50배가 넘는다. 강화갯벌센터(032-937-5057)가 갯벌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강화군은 내년 장화리를 정서진(正西津)으로 지정하는 선포식을 열 계획이다. 동막해변 오른쪽 끄트머리에 동네 어부들이 운영하는 어판장이 있다.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에 등장하는 그 어부들이다. 회 한 접시에 1만5000원이다.

함민복 = 단지 수업료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다 기계와 사귀지 못하고 그만둔 뒤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1998년 ‘성선설’로 시단에 나왔다. 시집 『우울씨의 일일』『자본주의의 약속』『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말랑말랑한 힘』을 냈다.

바닷가에서 가난하게 사는 시인은 정작 “가난하다는 게 부족하다는 거고, 부족하는 건 뭔가 원한다는 건데, 난 사실 원하는 게 별로 없다”며 가난에 초연하다.

소설가 김훈의 말을 빌리면 “시인은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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