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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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근데 옥정이 점심은 갖다줬나? 오늘 당번 누구야?”

기달이 관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옥정이 걱정을 먼저 하였다.

“아참,깜빡 했네.내가 당번인데.라면 하나 끓여서 갖다줄까?”

도철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부르스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또 언제 라면 끓여? 어제 사가지고 온 빵하고 요구르트나 갖다 줘.이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옥정이 때문에 고민이네.”

기달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정 안되면 처치하는 수밖에 없잖아.우리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말이야.저렇게 미쳐서 한 세상을 사느니 우리가 안락사시켜 주는 것이 옥정이한테도 나을 거야.”

용태가 평소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옥정을 돌보아줘야지.”

“이게 돌보는 거야? 완전히 짐승을 우리에 가둬놓고 사육하는 거지.”

“그럼 어떡해? 풀어줄 수도 없고.단원으로 일하도록 할 수도 없고.옥정이를 단원으로 받아들이는 장난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그랬으면 살인사건도 없었을테고.”

“살인,살인 하지마.우리는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어!”

용태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유리창도 없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전기공사를 하나? 여기는 전기공사를 할 리가 없는데.하긴 서너 집이 남아 있으니 전기 고장이 날 수도 있겠지.”

단원들이 우르르 용태 옆으로 달려가 용태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아닌게 아니라 몇 집 건너 전봇대 꼭대기에 전기공으로 보이는 사람이 올라가서 선들을 끊어내고 말아올리고 하고 있었다.그 사람이 시선을 비트 쪽으로 돌리면 단원들이

그 사람 눈에 띌지도 몰랐다.단원들은 허리를 잔뜩 구부려 창틀에 머리를 댄 채 그 사람의 동작을 주시해 보았다.

“저 선은 전선줄이 아니라 유선방송선 같애.유선방송국에서 전에 끊어놓은 선들을 수거해가는 모양이야.신경쓸 거 없어.아무튼 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이쪽 벽에 붙어 있자구.곧 작업이 끝나겠지.도철이 넌 옥정이에게 가보고.”

기달이 단원들에게 지시를 하며 대문 쪽으로 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도철은 크림빵 두 개와 요구르트 한 병을 챙겨 지하방으로 내려갔다.지하방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니 옥정은 방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춤을 추고 있었다.처음에 입고

있던 노란 원피스는 때가 꾀죄죄하게 묻어 있었다.

도철이 보기에 옥정이 이제는 자기 아버지가 죽은 사실도 잊어버린 듯하였다.충격적인 사건은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인데 하물며 미친 자의 마음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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