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천사’ 돈 보따리 선행 9년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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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나타났다. 이 독지가는 9년째 매년 이맘때 똑같은 장소에 남몰래 돈을 놓고 갈 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23일 오후 1시쯤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 지하주차장 입구 화단에서 현금과 돼지저금통이 든 종이상자가 발견됐다. 상자 안에는 현금 100만원짜리 20묶음(2000만원)과 돼지저금통,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 내세요’라는 메모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 직원들이 얼굴 없는 천사가 놓고 간 2000여만원의 돈을 세고 있다. [전주시 제공]


주민센터 직원인 방태웅씨는 “목소리가 30대 남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와 ‘화단에 박스가 있으니 가 보라’는 말을 남기고는 곧바로 끊었다”고 말했다.

이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 릴레이는 2000년 5월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 어린이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주민센터 민원대에 현금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놓고 가면서 시작됐다. 2001년 12월 26일에는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742만8000원을 놓고 총총히 사라졌다. 2002년 12월 24일에는 “사무실 앞 공중전화 부스에 성금이 있으니 이웃을 위해 쓰라”는 전화와 함께 현금 100만원과 61만2000원이 든 저금통이 발견됐다.

‘천사’는 이후에도 매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출현했다. 536만원(2003년)→545만원(2004년)→1045만원(2005년)→851만원(2006년)으로 선행을 이어갔다. 지난해에는 현금 2000만원과 돼지저금통의 동전 29만여원을 남겼다. 올해를 포함해 지금까지 낸 성금은 모두 8100여만원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성금이 든 봉투에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추위에 떠는 이웃에게 전해 주세요’ ‘지난해에는 경제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다들 힘내고 새로 뜁시다’ 등의 살가운 메모가 함께 담겨 있어 훈훈함을 더해주고 있다.

전주시민들은 선행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갖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매년 돈을 받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하는 노송동 주민센터의 직원들은 이들이 일가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2년 이후 뭉칫돈 기증자는 전화 목소리를 토대로 30대나 40대의 동일 남성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신앙심 깊은 사업가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서 해마다 연말이면 불우이웃 돕기에 뭉칫돈을 쾌척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내놓고 있다.

전북대 설동훈(사회학) 교수는 “선행의 주인공이 개인이든 어떤 모임이든 9년째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꾸준히 선행을 베푸는 것은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자부심마저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올해 경제위기로 유난히 우울한 세밑에 얼굴 없는 천사가 시민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장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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