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김현철 비극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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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가족의 발호와 부패는 뿌리깊은 것이다.자유당시절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양자였던 이강석(李康石)이 서울대 법대에 편입학한 후 권총을 차고 학교에 나타난 일에서부터 대통령 동생이 분탕질을 치고 돌아다닌 일,대통령 부인이 뇌물 챙긴 일,대통령 처고종이 황태자 소리를 들은 일…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이런 과거의 악폐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기대되던 김영삼(金泳三)대통령마저 임기말년에 아들문제로 절망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부인도 아들도 없는 고자대통령을 뽑을 수도 없는 일이고,세습왕조도 아닌 시대에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시대착오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선진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 각국에서도 이젠 차차'졸업'해가는 이런 권력자 가족비리가 왜 유독 우리나라에선 끊이지 않는가.제2,제3의'현철이 사건'을 막기 위해서도 우리는'현철이 사건'의 원인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 金대통령은 누구보다 가족관리의 중요성을 잘 아는 분이었다.92년1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며칠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金당선자는 상도동 자택에 모인 아들.딸.며느리.사위등을 둘러보면서“너희들 왜 여태 안돌아가고 여기 있느

냐.아버지가 대통령이 된다고 덕볼 일은 손톱만큼도 없을테니 빨리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처가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강조하다가 부인과 언쟁까지 해 화가 난 손명순(孫命順)여사가 당시 잠시 미국을 다녀온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金대통령은 가족관리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과거 대통령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굳은 결심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金대통령이 왜 차남 현철(賢哲)씨에겐 예외를 허용하고 오늘날 문제가 이렇게 커지도록 방치했을까.

자세한 내막과 까닭을 밖에서 단정하긴 어렵다.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현철씨 문제가 패거리정치라는 우리 정치구조의 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패거리정치에서는 '내편''우리편'끼리만 신뢰하고 나눠

갖는다.네편,다른편은 적 또는 경쟁상대일 뿐이다.우리편이 아니면 심하게

말해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게 패거리정치다.자기편끼리 똘똘 뭉치고

의리와 충성을 다짐한다.그만큼 폐쇄적이다.

92년 대선에서 상도동계가 정권을 잡은 후 허다한 총리와 장관들이

들어섰지만 다 외곽을 맴돌다가 물러난 것도 그들이'우리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정권과 국정운영은 우리편인 상도동계 끼리만 하게 되고

그러니까 공조직 무력화,측근정치.가신정치라는 비난도 나온 것이다.측근중의 측근이 누구였을까.두말 할 필요도 없이 아들이었다.그는 단순히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대선승리의 큰 공로자요 중요한 싱크탱크를 이끌었다.

그는 아들이자'우리편'의 가장 중요한 일원이었다.그래서

그에게'소통령'의 길이 열린 것이다.그들이 얼마나'우리편'중심이었는지는

현철씨의 YTN사장 관련 통화에서도 드러난다.“거 뭐예요.그 사람은

그전부터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잖아요.”

패거리정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대선을 앞두고 정권을 잡겠다고

경쟁하는 세력들은 많지만 이들 모두'주군(主君)+측근'이라는 기본구조는

마찬가지다.측근은 이념이나 정책보다 대부분 지연.학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고 주군이 집권하면 한 건 하겠다는 야심가들이 많다.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대부분 상도동계와 매우 흡사하다.그렇다면 다음 정권에서도 다시'우리편'이 권력을 틀어잡고 외부의 명망가들을 총리로,장관으로 앉혀봐야 실권을 안 주는 공조직 무력화와 측근정치가 재

연될 개연성은 많다는 얘기가 된다.힘쓰는 측근중에서도 부자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장 가까운 측근이 나올 수 있고 그러면 다시'현철이

사건'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결국 패거리정치에서는 기본적으로 수권(受權)태세가 갖춰질 수

없다.제한된 소수의 폐쇄적 패거리로서는 정치투쟁.정권투쟁의 효율성은

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정권담당과 국가경영에는 역부족이다.

사조직 아닌 공조직,오야붕-꼬붕간의 사(私)충성.사의리가 아닌

국가.국민에 대한 충성과 봉공(奉公)의식,국가경영 방법론의

동지(同志)의식,이런 집단이 정권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현철 비극의 교훈이다.연말 대선을 앞두고 각 세력은

패거리의 확대 아닌 공조직의 민주화.개방화로 정권을 잡을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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