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국가 홍보' 정부 외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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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영 정책기획부 기자

'여성계의 다보스 포럼'이라고 불리는 세계여성지도자회의 개막식이 열린 지난 27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84개국에서 온 900여명의 여성 지도자들로 성황을 이뤘다. 귀빈석에 앉은 참가자 중 장관급만도 54명. 하지만 한국 장관은 지은희 여성부 장관뿐이었다.

자리를 함께한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는 "국가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홍보 기회를 정부가 눈앞에서 놓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조직위 측은 28일 열린 만찬 행사에 노무현 대통령을 초청했지만 불참 통보를 받았다. 600여명에 달하는 외국인 참가자들의 여권번호를 미리 알려 달라는 청와대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서다. 여권번호를 몰라 신원조회를 못한 이상 안전 문제 때문에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그렇다 치자. 대통령의 불참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초 만찬에 오기로 했던 장관들이 줄줄이 불참 의사를 밝혔다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다.

한국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사장은 "국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정부가 너무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각 나라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모잠비크 총리와 베트남 부통령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보건정책위생부 장관, 필리핀 외교부 장관 등 비(非)여성부서 장관들도 상당수다.

독일 도이치텔레콤 부사장, 미국 다임러크라이슬러 전무이사, 캐나다 기업개발은행 수석부회장 등 경제계 인사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비록 이들 모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긴 했지만 84개국의 지도자를 한꺼번에 모아놓은 자리에서 국가 홍보 상영물 한번 틀어주지 않은 것은 정말 아쉽다. 혹여 이들에게 '여성이라서 무시한 것 아닌가'라는 인식을 심어줄까 걱정스럽다.

한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외국 대표들 사이에서 우리 정부의 홀대를 의식,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리 정부는 무얼하고 있는 걸까. 한국을 제대로 알릴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정부가 원망스럽다.

이지영 정책기획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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