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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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아니,사귀던 애인이랑 헤어진 거 어떻게 아셨어요?”

“우린 척 보면 삼천리죠.후후.”

구환이 구리심을 고정시키는 장치를 동축선 끝에 박아넣으며 비씩 웃었다.동축선을 안테나 단자판에 꽂고 텔레비전을 다시 돌려놓은 후 구환이 허리를 펴니 여자가 두 손에 오렌지 주스 잔을 들고 있다가 하나를 내밀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죠? 시원한 주스 한 잔 마시세요.”

“아,네.감사합니다.유선 방송이 잘 나오나 한번 시험해보고 마시죠.”

구환이 한 손으로 주스 잔을 받아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 텔레비전 전원 스위치를 눌러보았다.정규 방송이 없는 낮인데도 유선방송국에서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대개 인기 있는 연속극 같은 것을 녹화해두었다가 방영해주는데 그

날은 어젯밤 9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대낮에 밤 9시 뉴스를 듣는 기분이 묘했다.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 자매는 지난 1월20일경 모스크바에서 스위스로 함께 가 그곳에서 먼저 성혜랑씨와 딸 남옥씨가 탈출한 뒤 성혜림씨가 뒤이어 탈출,나중에 합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이렇게 합류가 예상보다 늦어진 것은 한국

내의 조급한 언론 보도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리나라는 치졸한 언론 경쟁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니까요,그죠? 언론에서 다 가르쳐주면 북한 요원들이 따라가서 암살을 할지도 모르는데.”

여자가 주스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언론의 경쟁 보도로 인하여 성혜림 자매의 망명이 차질을 빚고 있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게 말입니다.이번 일로 그동안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성혜랑씨의 아들 이한영이 자기 어머니와 통화를 나눈 내용이 녹음까지 되어 방송되기도 했으니 이한영 그 사람 신상이 더욱 위험하게 되었다니까요.사람이야 죽든 말든 특종이나

잡으면 된다는 언론의 태도는 거의 살인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한영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대서특필해서 판매 부수와 시청률을 올리겠죠.”

구환은 유선 방송을 시험해보면서 그 여자와 언론 경쟁을 성토하다 보니 어느새 방안에 앉아 텔레비전을 같이 시청하면서 정담을 나누는 셈이 되고 말았다.뉴스 화면은 바뀌어 강원도 고성지역이 화염에 휩싸인 광경이 방영되었다.

“산불은 23일 오후8시30분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군합동사격장에서 발생하여 강풍을 타고 인근 산으로 확산돼 24일 죽왕면 전체 면적의 절반이 넘는 2천5백여 헥타르의 임야를 태우고 간성읍과 토성면 쪽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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