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국정>4.자율화 비웃는 정치.관치 금융-官治금융의 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해 12월 은행연합회 회장을 선출할 때의 일이다.이종연(李鍾衍)전조흥은행장과 황창기(黃昌基)전은감원장으로 후보가 압축됐으나 투표당일 난데없이 재무부 출신으로 내무장관을 거친 이동호(李同浩)씨가 선출됐다.투표에 참가한 한 은행장

은“재경원으로부터 사인을 받고 그렇게 정했다.다 그런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은행 스스로의 압력단체 장을 뽑는데도 정부의 입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선 금융기관의 낙하산 인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그때마다 해당기관 노조가 반발해 농성을 하거나 출근저지운동을 벌이기도 한다.여기에는 자존심 문제도 걸려있다.

96년 3월 신명호(申明浩)전재경원 제2차관보가 주택은행장으로 선임될 당시 노조는'낙하산 인사 반대'를 표명한 대자보를 붙이고 10일간 농성을 벌였다.보험감독원 노조도 옛 재무부출신 임원이 선임되는데 반발해 출근반대를 위한 농성을

하기도 했다.다른 민간 금융기관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통과의식'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금융계에 대한 정부의 입김은 모피아(재무부의 영문약칭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로 불리는 옛 재무부 출신 전직관료들이 일선

금융기관에 대거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옛 재무부,옛 기획원 퇴직관료 모임인 재경회 회원명부에 따르면 96년 12월 현재 3백57명이 각 금융감독기관을 비롯,은행.증권.보험등 각 금융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 참조>

여기에는 주사.사무관 시절 공직을 그만두고 금융계로 빠져나간 사람들과 소수이지만 옛 기획원 출신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선후배로 끈끈하게 얽힌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상하관계가 엄격하고 군기가 센 옛 재무부의 조직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선배들의 부탁과 현직관료 후배들의 청탁이 스스럼없이 오가는 분위기를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은'한번 모피아면 영원한 모피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퇴임후 자리에 대해선 철저히 챙겨준다.한번만 봐주는 것이 아니다.처음에는 감독기관으로 내려갔다가 임기가 끝나면 관련 금융기관으로,또 그 자회사로 옮기는 형식이다.

D생보사 사장 K씨는 76년 시중은행 임원으로 나온뒤 20여년간 은행.증권.보험등 각 금융권을 종횡무진 누비며 다섯번째 사장직을 맡고 있다.물론 개인적으로 능력이 있고 금융기관의 인력수요가 맞아떨어지면 문제될 것이 없다.유능한 인

사를 민간이 활용하는 기회도 되기 때문이다.실제 자행(自行) 출신 행장보다 모피아 출신 행장이 더 업적을 내는 경우도 적잖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